이번 한가위 명절에도 차례를 지내며 큰 절을 올렸다. 환갑을 넘기고 나니 찾아볼 어른이 계시지 않는다. 우리 집안은 명이 짧은 편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고모님들은 여든을 넘겼지만 이제 다 돌아가셨다. 어른들이 살아계실 때는 명절 인사를 가면 꼭 큰 절로 예를 드렸었는데 우리 아래 대에서는 그 풍습은 사라진 듯하다.
사위가 다녀갔지만 집에 들어서면서 “저 왔습니다”하고 들어오며 고개를 숙이는 게 인사였다. 동서들이 찾아와서 식사를 했는데 장모님이 계셨는데도 명절 인사로 큰 절을 올리는 걸 챙기지 않았으니 맏사위의 불찰이었다. 큰 절은 윗사람에게 예를 표하는 가장 기본인데 나마저도 잊고 사니 안타까운 일이다.
명절에 어른께 드리는 큰 절은 윗사람에게 예를 표하는 기본인데
나마저도 잊고 사니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은 큰 절은 고사하고 머리를 숙이는 인사마저 제대로 하는 걸 보기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목례라고 해서 선 채로 머리를 숙이는 인사도 허리까지 써야 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개만 까딱하는 정도밖에 볼 수 없으니 절이란 말도 이젠 死語사어가 되어 버린 셈일까?
큰 절이 아직 일상적인 예로 행해지는 곳은 사찰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절에 들어서면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다. 어른들께는 큰 절 한번, 고인 앞에서는 두 번 절하고 부처님 앞에는 세 번 절을 올린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세 번 절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에서 법회를 할 때 법문을 하는 법사에게 예를 올리는 경우이다. 법사는 부처님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설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예를 받을 자격을 가진다. 그런데 스님 중에 삼배를 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경우를 보는데 예를 받을 자격을 잘 모르는 분이다. 절을 받아 마땅한 스님도 맞절로 예를 받는 걸 거두는 분도 있다.
법사는 부처님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설하기 때문에
가장 높은 예인 삼배를 받을 자격을 가진다
성철 스님의 삼천배는 아주 유명한데 스님을 만나려면 불전에 삼천배를 해야 했다. 정확하게 108배를 서른 번을 해야 했으니 3240번을 큰 절로 해야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백팔배만 해도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인데 삼천배라면 그 정도가 어떨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에 백팔배를 수행 삼아 매일 하는 사람도 여덟 시간을 꼬박해야 삼천배를 마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인이라면 여덟 시간이라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절하는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는 간절한 마음이라야 삼천배를 통과해 성철 스님을 만날 수 있었을 터이다.
삼보일배라는 수행도 간혹 방송을 통해 접해 본다. 삼보일배는 말 그대로 삼보를 걷고 한번 절하며 일정 거리를 이동하는 수행이다. 티베트에서는 라싸의 포탈라궁까지 오체투지라는 온몸을 길바닥에 던지듯 절하며 순례하는 종교적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6개월 이상 2000km를 오체투지로 순례하며 이 분들은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까?
성철 스님은 왜 자신을 만나려는 사람에게 삼천배를 요구했을까? 나도 불자로서 삼천배를 세 번을 했었다. 한 번은 여덟 시간으로 하룻밤에 마쳤고, 두 번은 수련대회에서 사흘에 걸쳐 삼천배를 채웠다. 혼자로는 해내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었다. 삼천배 수행을 통해 얻어낸 결과는 영험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가 많다. 모르긴 해도 삼천배를 마치고 나서 성철 스님을 만나지 않고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삼천배 수행을 통해 성철 스님께 들으려 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큰 절은 상대방에 대한 극상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치욕의 큰 절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三拜九叩頭禮삼배구고두례를 들 수 있다.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예를 표하는 행동인데 큰 절을 아홉 차례나 해야 했으니 인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머리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지요
조선시대의 문인 맹사성은 어린 나이에 벼슬이 높아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높았다.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그 고을에 도가 높은 스님을 찾아가 말싸움을 걸었다. 자신이 고을을 다스리는 좌우명을 일러 달라고 하니 스님은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선정을 베풀면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맹사성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라고 코웃음을 치니 스님은 세 살 먹은 아이가 아는 걸 여든 넘은 노인이 행하기 어렵다고 응수했다. 말문이 막힌 맹사성이 부끄러워 도망치듯 방을 나가다 키 낮은 문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스님 왈,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지요."
큰 절은 고사하고 머리를 숙일 줄 몰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부모자식 간, 사제지간, 선후배지간 등 사람의 관계에서 위아래가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제 우리 사회는 머리를 숙여야 할 대상도 없다. 학년 말이 되면 학생이 스승을 평가하게 한다니 지금 누가 누구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을까?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다는 스님의 한 마디가 절실하게 와닿는다.
격월간 에세이스트 2023.11~12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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