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의 무(無)와 불교의 공(空) / 하유진 |
특집 - 불교와 도교의 대립과 융합 |
1. 도가의 유무관(有無觀)
도가의 무에 대한 입장은 주로 노자(老子)와 위진(魏晋) 시기 현학(玄學)에서 나타나는 무에 대한 견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무에 대한 견해는 다시 유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노자의 유무관과 위진 현학의 유무관을 살펴보는 것이 도가의 무에 대한 내용이 될 것이다. 현학의 유무관은 다시 무를 강조하는 입장과 유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뉜다. 따라서 도가의 무에 대한 입장은 먼저 노자의 유무관, 다음으로 현학 가운데 무를 강조하는 유무관(貴無論), 마지막으로 현학 가운데 유를 강조하는 유무관(崇有論과 獨化論) 순으로 살펴볼 것이다.
먼저 노자의 유무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유무상대(有無相對)’로서의 유무관이다. 유무상대란 유형(有形)과 무형(無形), 유명(有名)과 무명(無名),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와 같은 개념들이 상하, 고저, 장단 등과 함께 서로 어우러져 대대관계(對待關係)를 형성하고 있으며, 세계는 그러한 대대관계들이 촘촘한 그물망으로 엮인 모습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유와 무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는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관계가 아니며, 모든 개념들은 그것과 상대되는 개념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유생어무(有生於無)’의 유무관이다. ‘유생어무’란 《노자》 40장의 “천하만물은 유에서 태어나고, 유는 무에서 태어난다(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는 구절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유는 무에서 생겨나고, 무는 유를 생기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노자》의 우주발생론적 성격을 설명해 주는 부분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도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무형적인 요소인 무, 그리고 무로부터 나오는 유형적인 요소인 유라는 순서를 밟는다.
셋째, 공간 분할로서의 유무관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 통에 꽂히는데, 바퀴 통의 빈 부분이 있어야 비로소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오목한 부분이 있어야 그릇으로서 쓰임이 있다. 창과 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안의 빈 부분이 있어야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노자》 11장)는 것이다. 노자는 유와 무의 관계를 공간 분할로 풀이한다.
방의 비어 있는 공간은 임시적 상태로 무에 처해 있다. 이 공간은 채워져서 유로 변할 때 가치를 획득한다. 비어 있음의 무는 채워짐의 유에 의해 쓰임이 되는 것이다. 또 방이라는 유형은 비어 있음이라는 무형에 의해 방으로서의 가치를 확보한다. 방이라는 유는 비어 있음이라는 무에 의해 이로움이 되는 것이다. 즉 무가 없이는 현실의 사물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의 쓰임(以無爲用)이라는 왕필(王弼)의 무용(無用) 사상으로 연결된다.
다음으로 현학의 유무 개념을 다루기에 앞서 본말(本末)의 의미부터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본(本)이란 사물의 근본이자 본래의 처음이라는 뜻으로서 천지의 시작, 사물의 어미, 개별 사물의 근원을 의미한다. 말(末)이란 세부적 마디, 변화와 운동을 뜻하며, 자연의 법칙을 벗어난 인위적 간섭, 세속적 지혜, 지식 체계, 교묘함, 꾸밈 등을 일컫는다. 따라서 본은 형체를 넘어서는 것, 우주의 근원이며, 말은 형체를 지니는 것, 즉 현상적 세계를 말함을 알 수 있다.
현학에서 다루는 본말, 유무 등의 문제는 철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인륜적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유라 함은 이름이 있고 형태가 있는 구체적인 존재 사물로서 천지만물을 가리키며 또한 정치 인륜을 가리키니 명교(名敎)라고 하는 것이다. 명교란 사회정치 제도와 윤리 도덕 등 문화를 총칭하는 것으로 내재(內在), 방내(方內)와 비슷하고 현실적인 태도나 관심을 나타낸다.
본체론에 있어서는 말, 유와 관련되며 인륜 질서를 중시하는 유가에서 강조하는 입장이다. 무라 함은 이름이 없고 형체가 없는 본원적인 것을 가리키니 도(道) 혹은 자연(自然)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이란 자연관과 인생관을 포괄하여 말하는 것으로 초월, 방외(方外)와 유사하며 초월적인 태도나 관심을 말한다. 본체론에 있어서는 본, 무와 관련되며 도가에서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상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無形 無名 無爲 自然 無 本 內 一 靜 意 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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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形 有名 有爲 名敎 有 末 外 多 動 言 名
무를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는 왕필은 객관 세계의 일체 속성을 포괄하는 최고의 추상 개념으로서 무를 설정하였다. 그는 노자의 ‘유생어무(有生於無)’에 대하여, “천하만물은 모두 유를 생으로 삼는다. 생의 처음은 무를 근본으로 삼는다. 유를 온전히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무로 돌아가야 한다.”1)라고 하여 무가 유의 근본임을 말하였다(以無爲本). 왕필은 무를 유, 즉 현상계 내의 모든 것의 원인, 존재근거로 규정하고, 무가 현상계 배후에 있는, 규정하거나 형상화할 수 없는 본체임을 밝혔다.
이러한 본체로서의 무는 물질성을 지닌 것이 아니며 현상적인 사물과는 존재론적으로 같지 않은 것이다. 무는 만물의 상위 혹은 만물의 배후에 있으면서 제1의 가치를 지니며 현상계의 만물은 본체와 비교하여 열등한 가치를 지닌다. 즉 형체가 있는 사물은 형체가 없는 본체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고 만물의 근거는 무형, 무명한 무인 것이다.
노자는 생성론, 발생론의 각도로부터 유무를 파악하였으니, 즉 능생(能生)과 소생(所生)의 관계로 유무를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왕필은 본말 관계로 유무를 해석하고, 본을 위주로 말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왕필에게 있어서 무란 유와 무의 상대적 관계를 초월하는 일종의 지고무상한 지무(至無)로서, 온갖 사물이 생기는 근원이다. 왕필은 노자의 ‘유생어무’라는 발생론적 우주론을 계승하면서 만물의 본원으로서의 무에 법칙성을 부여하여 사물에 내재된 법칙으로 해석하였다.
노자는 원래 어미를 얻어서 자식을 아는 것과 자식을 알아서 어미를 다시 지키는 것을 동시에 제시하며 어미와 자식의 관계를 쌍방향적 관계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왕필은 어미를 얻어서 자식을 아는 것 일변도로 편향된다(崇本息末). 즉 말단과 자식의 가치는 근본과 어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연후에 어미와 자식의 상호의존 관계를 통해 근본과 말단이 서로 상대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사물의 참된 모습을 인식하려면 구체적 형체를 지니는 현상의 지엽 말단에서 시작하지 말고, 현상계의 모습을 초월하는 본체에서 착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체를 파악하면 현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지극한 본래의 이치를 파악하면 상이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게 된다. 결국 왕필의 귀무론은 상이한 사물의 배후에 있는 근본적 이치를 파악함으로써 각각의 개별적인 현상을 파악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왕필은 무와 유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무는 무로써는 밝힐 수 없으니 반드시 유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사물의 극한에서는 반드시 그 말미암은 바의 종지를 밝혀야 한다.”2) 무는 유의 근본이긴 하나 독립적으로 스스로 밝혀질 수 없고 반드시 유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무, 찰흙, 벽이 수레, 그릇, 방을 이루는 까닭은 모두 무를 쓰임으로 삼기 때문이다.
무란 유가 이롭게 되는 까닭이니 모두 무에 의지하여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3) 왕필은 무는 유의 근본이라고 하였고 또 무는 유에 의지하여 그 쓰임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릇은 자신의 근본(무언가를 담는 것)을 그 형태 속에서 실현함으로써 근본을 드러낸다. ‘무언가를 담아냄’은 그릇이 없이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왕필이 본원으로서의 무라는 바탕 위에 유무 간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다면, 배위(裵퐯)와 곽상(郭象)은 오히려 무를 부정하고 유를 강조한다. 배위는 이무위본의 본체론이 극단적으로 발전하여 유가의 예법, 즉 명교를 철저히 부정하는 등 방탕하고 허무주의로 흐르는 데 대한 반발로 숭유론을 주장하였다. 숭유론의 입장에서는 유만이 있고 무는 없으며 무란 유가 없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따라서 생겨나 있는 것은 귀무론이 주장하는 무와 같이 어떤 근거, 본체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다. 즉, 무는 유를 생기게 할 수 없고 유는 언제나 유일 뿐인 것이다. 허무는 만물에 이익될 바가 없고 단지 유만이 만물을 다스릴 수 있다.
곽상은 현상계 배후의 존재근거로서의 본원적 무를 부정하였다. 무는 무일 뿐이고, 유를 생겨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유뿐이며, 유의 존재근거는 자기 자신(自性)인 것이다. 사물의 생성과 변화는 어떠한 외재적 역량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떠한 조건에 의지함 없이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변화한다. 유는 스스로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자족적 존재이며, 사물 각각은 그 본성에 임하는 것이 요구될 뿐인 것이다. 이러한 유의 존재 형식을 살펴보면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없으며(無因), 스스로 생기고(自生), 스스로 나고(自出), 스스로 있으며(自有), 외부적인 존재에 의지하지 않는다(無待). 이러한 유의 존재 형식이 최고로 발현된 경지가 독화(獨化)이다.
독화란 외부의 원인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충족시키는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화가 개인적으로 체현되는 과정을 보면, “지인은 사물에 무심하게 대응한다(至人無心而應物).” “성인은 사물에 무심하게 따른다(無心而順物).”고 하여 무심(無心)을 강조한다. 즉 무심이란, 유에 대하여 주관적인 편견이나 집착을 갖지 않고 그 본성에 따르는 것이다. 독화가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과정은 내성외왕(內聖外王)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자연과 명교의 조화를 말하는 것이다.
2. 불교의 공(空)
초기불교 경전 중 하나인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적멸(寂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4)
무상이란 세간 만물은 변화의 한 가운데 있으며, 영원히 고정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무아란 인간의 생명현상 중에 주재(主宰)적 의미의 개체성이 없다는 뜻이다. 적멸이란 인간이 윤회로부터 벗어난 뒤에 도달하는 경지를 가리킨다. 무상과 무아와 적멸은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다.
세상에는 영원히 불변하는 고정적인 존재란 없으므로 인간존재 가운데 주체적 의미의 항상적 자아라는 것 역시 없다. 따라서 해탈한 뒤에도 역시 불변하는 자아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난 무상과 무아와 적멸은 공(空)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제시한 연기(緣起), 오온(五蘊) 등의 이론 또한 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연기란 사물이 각종 인연 조건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남을 말한다. 사물과 인간의 생명현상은 결과를 내는 직접적 원인 혹은 내재적 원인인 인(因), 그리고 결과를 내는 부수적 원인 혹은 외재적 간접 조건인 연(緣)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즉 사물은 인연 화합의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나 인간을 비롯한 생명현상의 변화 과정은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요소들의 이합집산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연기란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의 상호 관련성 또는 의존관계를 가리킨다. 연기법에 따르면 혼자서 생겨나거나 혼자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존재들은 그것을 발생하게 한 원인들과 그 원인들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연기법에 의하면 존재는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조건 지워져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존재가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오온이란 다섯 종류의 요소들(法)이 집적되어 모여 있는 상태라는 뜻으로, 육체적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 요소인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구성된다. 색온(色蘊)은 다시 뼈(地), 체액(水), 체온(火), 가스(風)의 사대(四大)와 사대에서 파생된 감각기관인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의 오근(五根)으로 이루어진다. 수온(受蘊)은 느낌 또는 감정을 말하는데, 감각기관에 의해 얻어진 괴로움(苦受), 즐거움(樂受),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不苦不樂受)을 가리킨다. 상온(想蘊)은 대상들을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을 말한다. 행온(行蘊)은 의지 작용을 말한다. 식온(識툡)은 분별 또는 인식 작용이다. 그러나 오온은 고정불변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물질은 변하고 소멸되는 것이며, 정신은 감각기관들과 대상들 간에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비유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육체는 거품덩어리 같고, 느낌은 거품방울 같으며, 생각은 신기루 같고, 의지는 바나나줄기 같고, 의식은 허깨비 같다는 것이다(《잡아함경》). 따라서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오온이라는 덩어리 역시 언젠가는 소멸되는 무상한 존재일 뿐이다.
아비달마 시대에 이르면 개체를 유지, 지속시키는 통일적 주관적 존재인 인아(人我)와 그러한 개체를 구성하는 객관적 실재적 구성 요소로서의 법아(法我)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공(空)을 해석하게 된다.
소승불교 가운데 대표적인 부파인 설일체유부가 말하는 공은 일종의 분석공(分析空) 개념으로서, 그들은 사물의 비실재성 또는 사물이 공임을 논증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분석의 방법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현상계에 존재하는 집합체로서의 사물을 계속적으로 분해해 나가다 보면 공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이란 사물의 분해 가능한 특성을 가리킨다. 예컨대 항아리란 명칭은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만약 항아리가 깨어져 부서진다면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일시적으로 시설되므로 세속이라고 한다. 즉 세속의 이치에 따라 설명하되, 진실되어 거짓이 아니라면 세속제(世俗諦)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 어떻게 해도 그에 대한 지각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승의제(勝義諦)라고 한다. 예를 들어 색(色)이나 수(受) 등에 대한 지각은 그대로 존재하므로 승의가 된다. 이러한 이치로 설명하여 진실되어 거짓이 아니라면 승의제라는 명칭을 얻는 것이다. 즉 법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법이 모여서 구성하는 대상은 잠시 이름을 얻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법을 바라보는 관점은 법유(法有)라고 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는 부분의 취합으로 이루어진 사물이 최종적으로 훼멸됨을 보지 못하고 집합체가 실유(實有)한다고 여기는 것을 속제(俗諦)라고 하였다. 한편 집합체가 분해된 뒤에도 최종적으로 남아 더 이상 분해되지 않고 실유(實有)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진제(眞諦)라고 하였다. 이처럼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세간언설을 가명(假名)으로 보고, 그 근원이 되는 법을 승의제라고 보는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윤회의 주체로 상정된 푸드갈라 개념을 통해 아(我)와 법(法)이 모두 공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푸드갈라가 성립된다 함은 오온(五蘊)의 집합에 대해서 실체적인 인아로서의 푸드갈라라는 인식, 명칭, 관념이 붙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드갈라는 오온에 의해서 그 존재의 관념, 명칭이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독립자존성이 없는 무아(無我)이다.
장작에 의해서 불이 성립된다는 말 역시 불이라는 실체의 관념이 타는 장작에 의해 생기(生起)하기 때문에 타는 장작에 의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독립자존성이 없는 연생법(緣生法)이자 무아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타는 장작(五蘊) 또한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다. 타는 장작은 불의 뜨거운 성질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불과 같지만 태움(能燒)에 대한 태워짐(所燒)이 된다는 점에서는 불과 다르다.
따라서 타는 장작과 불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은 상호의존적 관계이다. 이와 같이 독자부는 장작과 불, 즉 오온과 푸드갈라의 관계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상의상대(相依相待)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독자부의 이러한 주장은 다른 논서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예컨대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서는, “푸드갈라는 오온에 즉하는 것도 오온을 떠나는 것도 아니며 오온에 의지하여 삼계에 처하는 것으로 가설적인 이름이다.”5) 라고 하여 오온과 푸드갈라의 상의상대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대중부(大衆部)에서는 삼세법 중 현재법만이 실재하고, 과거법과 미래법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현재법은 인연이 모여 사물을 구성하므로 실유하는 것이다. 과거법은 인연이 흩어져 다른 것들로 변하였으므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미래법은 인연이 아직 모이지 않았으므로 또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법만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과거와 미래는 실재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부의 한 계파로 알려진 방광부(方廣部)의 경우, 악취공(惡趣空)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체의 사물이 텅 빈 환상과 같아서 아무것도 없으니, 마치 토끼 뿔이나 거북이 털과 같다는 것이다. 방광부의 공관은 ‘공무소유(空無所有)’로서, 절대무(常無)를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부파불교의 공관(空觀)은 사물의 현상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였으나 사물의 본성, 즉 연기관에 대한 논의는 철저하지 못하다는 문제가 있다.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래 반야 학자들은 소승불교가 주로 사용한 분석공이라는 방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불교의 근본 원리인 연기적 측면에서 사물 현상의 공성(空性)을 논증할 필요성을 느꼈다. 반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분석공이 다루는 공 개념은 흩어짐이 곧 공이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흩어지지 않는다면 공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소승 부파들이 현재법이 불공(不空)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공을 단지 현상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특정 조건하에서는 공이 아닌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면 불교에서 설하는 공의 원리는 흔들리게 된다. 대승 반야학은 사물이 표면적 현상이나 그 구성 요소의 흩어짐을 통해 공임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이라는 본질적 측면에서 공임을 주장하였다.
중관학파는 반야학보다 좀 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연기성공을 주장하였다. 중관파는 소승 유부(有部)의 실유론(實有論)을 반박할 필요성에서 공 사상을 주장하였고, 방광부(方廣部)의 허무론을 반박할 필요성에서 가유설(假有說)을 주장하였다. 즉 한편으로는 절대화된 유(有)의 견해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화된 무(無)의 견해를 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관파는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비판하고는 있지만 주로 유견(有見)에 대한 비판에 중점을 두었다. 이점은 중관파와 반야 계통 경전의 태도가 일치하는 바이다. 다만 중관파는 중도(中道) 원칙을 철저히 관철시키는 측면이 강하고, 반야계 경전은 공(空), 유(有)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완곡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중관파는 중도의 기본 사상에서 출발하여 자신들이 설하는 공이 방광부 등의 악취공(惡趣空)과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공이란 단지 연기, 다시 말해서 가유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연기와 성공은 일치하는 것이니, 진제와 속제가 상즉(相卽)한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세간적 진리로서의 속제는 범부의 입장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중생을 위해 행한 설법으로서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반야지혜에 의해 발견되는 진리로서, 사성제, 오온설 등과 같이 부처가 교설한 내용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로서의 이법(理法)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열반이란 언설을 떠난 세계이므로 법의 인식 단계를 뛰어넘어 수행에 의해 반야바라밀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해탈, 열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중관파는 진제에 의거하여 공(性空)을 설하였고, 속제에 의거하여 유(假有)를 설하였다. 그러나 둘 사이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니, 속제가 비록 유를 말하나 속제를 떠나서는 제일의(第一義)를 얻을 수 없다. 진제가 표명하려는 의미는 절대적 의미의 공무(空無)가 아니라 속제가 설한 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제(二諦)는 일체(一體)의 두 가지 측면이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중관파가 강조한 부처는 이제에 의거하여 설법하였지 일제(一諦)에 의거하여 설법하지 않았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반야계 경전의 해석과는 조금 다른 점이다. 중관파는 이제를 모두 부처가 중생에게 설법한 언교(言敎)라고 본다.
중관학파의 사상 속에서는 속제이든 진제이든 모두 절대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야 계통 경전에서는 상대적으로 진제가 더욱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다. 중관파의 이제 이론은 짙은 중도의 색채를 띠며, 여기서의 진제는 사실상 실상 또는 열반의 의미를 지닌다. 중관파와 반야계 경전 간의 이제 문제에 대한 견해의 구별은 중도 관념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3. 나오는 말
도가의 무는 유의 상대 개념으로서의 무, 발생론적 근원으로서의 무, 빈 공간의 쓰임으로서의 무, 유가의 인위도덕에 상대되는 자연주의적 가치관으로서의 무, 사물의 존재 법칙으로서의 무 등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여기서 현상적 존재의 존재성에 대한 회의는 찾아볼 수 없으며, 존재에 대한 절대 긍정의 사유 경향마저 나타난다. 이상으로 볼 때 도가의 무란 사물의 기원 또는 법칙성이라는 의미로 요약될 수 있다.
무의 이와 같은 법칙성에 대한 강조는 이(理) 개념으로 환원되어 송명이학(松明理學)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중국 철학의 기본적 사유 구조는 사물 자체에 대한 절대 긍정과 그 이면에 있는 법칙성에 대한 강조로 귀결될 수 있다. 이는 현상에 대한 본체라는 이원론적 사유 경향으로 해석 수 있으며, 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본체에 대한 강조를 전제로 하여 본체의 규명을 통해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관계 설정이 눈에 띄는 점이다.
반면 불교의 공 개념은 현상적 존재가 변화 소멸하는 과정 중에 있음에 주목하고, 일체의 실체적 사유를 거부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선행하는 조건들에 의존하여 임시적으로 있는 것이지 독립된 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非有). 그러나 임시적으로나마 사물들은 존재하고 있으므로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다(非無). 현상계는 연기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영원한 자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유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현상계 자체는 이미 구체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현상계가 지닌 무자성의 성질(不有)과 임시적 존재성(不無)은 동일한 대상의 두 가지 모습이다. 즉, 무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의 각도에서 보자면 그것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연기의 원칙에 입각해서 보았을 때, 세간이 유라고 하는 것과 세간이 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동일한 세계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은 필연적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즉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현상의 그러한 모습을 일러 공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이치는 곧 사물의 현상적 모습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배후에 설정된 법칙이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인 것이다. -불교평론 2006. 6. 10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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