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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개념의 특징>

무설자 2017. 8. 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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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 개념의 특징>

             

                                             수미산

                             

   ‘공(空)’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sunya’는 형용사로서 속이 텅 빈, 부풀어 오른, 공허한 등의 뜻을 가졌고, 명사 ‘sunyata’는 공한 것, 공성(空性), 영(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공이란 텅 비어있다는 뜻이 되겠다. 이것은 절대적 무(無) 존재의 상태가 아니라 존재는 있으되, 그것이 결정되거나 특별한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자니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당나라시대 현장(玄奘) 법사가 빌 공(空)자로 번역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AD 2세기 중관학(中觀學)을 수립한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이다.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에서는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하고, 독자부에선 윤회하는 인격 주체로 개아(個我, 뿌드갈라/pudgala)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정했다. 용수는 아를 비판하면서 법체니 개체니 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이는 곧 「무자성(無自性) - 공」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이 ‘공(空)’이라는 글자가 산스크리트 원어 ‘sunya, sunyata’의 참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空(공)’이라는 한자에 너무 집착하면 원래 의미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공(空)이란 말은 자성(自性, svabhava), 실체(實體, dravya), 본성(本性, prakti), 자아(自我, atman)라고 하는 것들과 같이 인간이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본질적인 것들이 실체로는 없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대승불교의 근본교의로 현상계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생멸하는 존재이며(연기하는 존재),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고,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 했다. 따라서 공이나 중도(中道)는 연기법의 연장이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무(無)라고 해석하고, 어떤 분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로(0)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공이라고 하는 말은 무의 개념이 아니다. 공(空)과 무(無), 이 둘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어렵다. 없다(無)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공(空)하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체가 없어서 모양이나 형태가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만 무(無)는 공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無)와 공(空)의 의미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는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다는 말이다. 공은 없는 게 아고, 비어있다는 말이다. 비어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즉,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성이 공하다, 비어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공은 불이(不二) ― 이원적 대립의 극복으로 요약된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을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설명한다. 부증불감은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하는 것으로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 절대 평등(平等)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말을 부정한다. 우리의 몸은 분명히 있다. 또 생각도 있다. 하지만 그 실체가 없다. 우리 몸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 몸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계속 변한다, 흐른다, ― 즉, 연기한다. 따라서 비실체이다. 연기하는 것의 특징은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의존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이다. 즉, 실체가 없다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공은 ‘무상, 무아, 비어 있다, 흐른다’라고 표현한다. 공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불교의 ‘흐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물은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속성을 가졌다. 비어 있는 곳을 채우기 위해 흐른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면 높낮이가 있지만 그 본질에서 보면 물이라고 하는 것은 빈 곳을 채운다. 웅덩이를 만나면 웅덩이를 채우고, 채워지면 넘쳐서 다시 흐른다. 비어있는 곳으로 흐르는 것이 공의 속성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은 그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현상적 차원에서 이렇게 실체가 없음을 이름 해 공(空)이라고 한다.

   사람이나 자연, 모든 것이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찰나찰나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면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영원한 ‘나’와 영원한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화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에도 ‘영원한 나’ ‘영원한 나의 것’이 없다 - 무아(無我)라는 이 사실 ― 그것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참다운 진리이다. 무아(無我)란 그 스스로의 자아(自我)가 없기 때문이며, 자아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 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직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일체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본성이 공하며, 또한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관하라 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계나 자신을 대하면서 실체론적 사고를 중단할 때,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도 알맹이가 없구나 하고 진실하게 느낄 때, 공이 작동한다. 공은 말이나 관념에 의한 고정화를 일체 배제하는 구실을 가지고 있고, 공이나 중도는 속박을 부수는 도구이며, 사물에 대한 고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곧 중도(中道)의 생각에 이어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단순한 존재론적 또는 인식론적 무(無)의 관념과는 구별된다.

   공이란 곧 평등(平等)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착하다ㆍ악하다, 부자다ㆍ빈자다, 미남 ‧ 추남, 남ㆍ녀 등 여러 가지 분별이 있다. 그렇지마는 여기엔 모두 인간이라고 하는 평등한 면이 있다. 또 일체의 사물은 가지가지로 변해가지마는 그 변해가는 것 가운데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변한다고 하는 그 변하는 과정에는 어떤 준거(準據)의 틀, 곧 어떤 원칙이 있다. 예컨대 봄 다음에 반드시 여름이 오고, 여름 다음에는 반드시 가을이 온다. 이어서 겨울이 온다. 이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변화 가운데를 일관해서 변하지 않는 큰 것을 포착하는 것이 공을 아는 길이 된다.

   공이라는 것은 차별이나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무차멸, 곧 평등한 무엇인가를 잡는 것을 말한다. 흔히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니까, 모든 것이 다 허무ㆍ허망하다며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이 있다. 영민하고 예민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정말 공(空)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색(色)’이란 모양을 뜻하며, 곧 차별을 뜻한다. ‘즉(卽)’은 떨어지지 않음(不離)을 의미한다. ‘공(空)’은 평등, 즉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부언하면 차별이 있는 것, 곧 가지가지로 변해가는 것을 떠나지 않고, 그 가운데를 일관해 있는 평등의 이치를 구한다는 것이 곧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색)은 유한한 무엇인가를 말하고, 공은 무한한 무엇인가를 일컫는다.

   천지간의 만물이 다 각각 다르다. 인간도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다른 인간을 떠나서 도(道)를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차별 있는 인생을 떠나지 않고, 그 차별 있는 인생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그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평등한 이치를 포착하는 것이다. 결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차별 가운데서 평등한 이치를 잘 분별하는 장점을 갖춘 이가 혜명 수보리(慧命須菩提) 존자였다. 그래서 공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해서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칭했다.

   

   공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해 현정(顯正)하는 데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대립적인 상대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으로 공은 가설적인 이름을 붙여 공이라고 한 것일 따름이며, 공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밝히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반야경> ‘문승품 제18’에서 다음과 같이, 즉 “일체의 존재[法]는 공이며, 그 공도 또한 공이다. 상(常)도 아니요, 멸(滅)도 아닌 까닭이다. 무엇으로 그렇게 되는가. 성품 스스로가 그러하므로, 저절로 그렇게 되기[성자이(性自爾)] 때문이다. 이를 공공(空空)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공 역시 공한 것이므로 공을 집착해서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공성(空性)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에 낀 갖가지 분별망상의 때를 씻어내기 위해 공의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그런 공의 가르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의 가르침에 집착하는 것, 다시 말해 공견(空見)을 갖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분별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가르친다.

   

   공이란 자기부정이며,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공은 인연에 대한 해석이다. 인연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기에 실체가 없다는 말로서, 존재론적으로나 가치론적으로 모든 고정된 속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 부정은 단순히 소극적인 허무가 아니라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 무애자재(無礙自在)한 절대적인 존재방식을 시사하고 있다. 공은 집착하지 않는 것, 얽매이지 않는 것, 머물지 않는 것이다. 공이란 철저한 초월의 영역이며, 공 자체도 공하며, 영원한 실체(자성)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렇기 때문에 모든 현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고 가나 분명히 현상으로는 작용하나니, 즉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묘하게 존재하는 진공묘유의 관계, 이것이 나아가면 불교의 우주관이고 본질관이기도 하다.

   진공묘유란 진실로 비운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목탁을 보라 텅 비어 있어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이다. 범종각의 범종을 보라 속이 텅 비어 일승원음(一乘圓音)의 완성된 음운(音韻)이 나는 것이다. 텅 빈 충만, 비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라 한다.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하다.

   비웠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움의 작용은 있다. 도인(道人)이 그 작용을 일으키면 그에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의 번뇌 없이 마음을 내는 작용이므로 도력(道力)이라 하지만 범부중생이 작용을 하면 온갖 망념이 덩달아 일어나므로 생각이나 행위, 모든 것이 난잡할 수밖에 없다. 진공묘유의 작용은 지혜에 속하지만 군더더기가 붙은 마음의 작용은 번뇌일 뿐이다.

   공(空)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因]이 프리즘[緣]을 통과하면 7색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果]과 같아서 진실로 비어있다(眞空)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妙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란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며, 공을 근원으로 해서 존재한다. 공의 당체(當體-본체)는 공이 아니라 진공묘유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진공묘유 그 자리가 바로 불성(佛性)의 자리를 말한다.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으니 공한 것이다. 그 불성의 실체는 공하지만 우주에 꽉 차 있다. 그것이 불성의 특질이다. 그리고 불성이 작용하는 원리를 진리라고 한다. 진리라는 것이 우주 어디에나 통하듯이 불성 즉 본래 성품, 본래 모습은 공하지만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것에 상즉해 있다. 그러므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불생불멸인 것이다.

   이 무한대의 우주공간, 그 속의 지구까지 포함한 거대한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있다. 만약 수시로 오차가 생긴다면 지구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그 근원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조화라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의 작용이라고 한다. 하느님이라고 이름 하든 알라라고 이름 하든 이 우주공간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고, 지구는 그 속에서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면서 4계절이 있고, 밤낮이 연속되는 이 작용의 근원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반야심경>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란 말이 나온다.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제법의 본질이 곧 공상(空相)이라는 말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공 한 것이라는 말이다. 공은 본래모습이 없지만, 중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공한 모습이란 용어를 쓴 것고, 공한 모습이라서 불생불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의 공한 모양은 바로 불생불멸을 비롯한 남 녀, 남 북, 밤 낮 등 온갖 상대개념을 다 포함하고 있다. 공한 본질 속에는 이 모든 것을 흡수함과 동시에 표상으로 확산시키는 상반된 작용을 갖고 있다. 그만큼 공은 역동적이다. 그리고 일체법이 존재하는 모양이 바로 공이기 때문에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며,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생성과 소멸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 이면에 모든 현상은 생할 수도 있고, 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본래 공이기 때문이다.  

   

   공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공에 관한 이 책 저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공이란 이런 것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한 책이 없다. 이 글도 그렇지만 기껏해야 공의 특징을 나열하는 정도이다. 왜 그런가. 불교는 원칙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불교의 ‘공(空)’을 이론적으로 혹은 알음알이로 이해하려 들면 이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공은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이며, 체득해야 하는 깨달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공을 알면 불교를 다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평생 공을 알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모르고 간 사람이 더 많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바탕으로 하되 치열하고도 기나긴 수행 끝에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의 것을 알려면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언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공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만 닿은 수 있는 영역이다.

   일체가 공하다는 관찰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야지혜로서 공관은 용수와 그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있어 이제설(二諦說)의 입장에서 명확히 그 구분이 요구됐던 것이다. 이처럼 반야경계 경전은 법의 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공관은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 즉,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을 벗어버린 자기, 개체인 자기로부터 전체인 자기로 변신이 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자기 자신이 부처가 되는 길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자기실현의 길이고, 형성의 길이다. 부처는 단지 먼저 이루어진 인격일 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 법정 스님의 <일기일회> 중에서

   우리 중생은 ‘내 것’이라 할 게 하나도 없고,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인 양 여기면서 가지고 지키려고 발버둥 치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한다. 고집도 욕심도 사랑까지도 모두 탁 놓아버려야 한다. 그게 바로 공의 영역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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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misan511
글쓴이 : 아미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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