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시와 좋은 시

갈대는 배후가 없다

무설자 2015. 4. 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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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 영 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흘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나이가 의식될 때가 있다.

이순, 세상의 순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할 나이인데도 아직 치기를 벗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는 날이다.

아무도 의지처가 되어주지 못하고 스스로 서지 못한 처지가 지금임을 절감하면서 허리춤을 추스리고 등줄기도 꼿꼿하게 세워본다.

 

반골의 동지라니 아무리 돌아보아도 어리석은 이 마음을 맞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간혹 치기를 부릴 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나 그가 아군인지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누구와 마주 앉고 싶은 날에 내가 청하는 자리에 앉아 줄 사람은 있으니 그가 동지일까?

 

'갈대는 배후가 없다'...

배후가 없다는 그 단도직입적인 말이 푹하고 내 마음에 칼이 꽂히는 것 같다.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이라니 나는 내가 배경이 될 수 있을까?

 

에이...차나 마시자.



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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