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나는 부처다

'빈자일등(貧者一燈)', ‘부자대등(富者大燈)’

무설자 2012. 5. 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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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일등(貧者一燈)', ‘부자대등(富者大燈)’

 

불경 현우경(賢愚經)에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난타는 부처님께 등(燈)을 바치고 싶었지만 너무나 가난했으므로 가가호호 구걸하여 보잘 것 없는 등을 마련해 올렸지만 기름이 너무 적어 오래 가지 못할 것이어서 걱정이었을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크고 화려한 등은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 꺼져 버렸다. 그렇지만 기름이 부족한 여인의 등불만 남아 홀로 타올랐다. 다음날 목련존자가 아무리 끄려 했지만 그 여인의 등은 꺼지지 않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셨다.

"그만 두어라. 정성을 기름으로 삼아 밝힌 등이니 바닷물을 기울여도 끄지 못할 것이다."

 

이 빈자일등의 이야기는 부처님오신날이면 등을 밝히는 의미를 가장 적합하게 설명하는 예로서 빠지지 않는다.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은 무명이라고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뜨리는 지혜를 뜻하는 상징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중생의 어두운 삶을 밝히는 등불을 켜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부처님오신날에 등불을 켜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이 어리석음 속에서 사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서 뱀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무명이라 하였다. 그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두려움의 원인을 찾을 수 있으니 불을 켜는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우리는 어떤 등을 켜는 것일까? 부처님은 빈자일등의 의미로 마음을 다해 등을 켜라고 하셨건만 정작 켜는 등은 복을 구하고 화를 면하고자 하는 소원등, 구복등을 켜고 있는듯 하다. 등의 크기나 장식, 등을 다는 장소에 액수를 매겨놓고 마치 비싼 등이 바라는 바 소원을 이룰 수 있고 복이 등의 액면가에 정해져 있는 듯이. 빈자일등보다는 부자대등을 권하는 분위기가 부처님오신날의 사찰 분위기이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절 곳곳에 소원을 빌고 복을 구하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하고 그 앞에 불전함이 놓아두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소원을 이루어주고 복을 나누어주는 분일까? 죄를 지은 이가 불상 앞에 재물을 놓고 엎드려 빌면 그 죄가 없어지고 마음먹은 일을 이루기 위해 기도를 하면 바라는 대로 해결될 수 있다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느 경전에 나와 있을까? 불교는 애석하게도 그렇게 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무명 속에서 헤매는 중생을 위해 지혜의 등불을 스스로 밝힐 수 있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부처님이 가르침이다. 꼭 스스로 지혜의 등불을 밝혀야 한다는 의미는 타인이 대신할 수 없으므로 부처님은 절대자로서 해결사가 아니라 스승이며 길잡이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과 우리의 중간자인 출가자인 스님은 성직자가 아니라 재가신도보다 앞서서 그 길을 찾아가는 위치인 수행자라고 볼 수 있다. 출가자는 재물을 스스로 얻지 못하므로 재가자의 외호外護를 받아서 수행에 전념하고 그 결과를 재가자에게 나누어줄 의무를 가지는 관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스님이 수행자의 위치를 망각하고 성직자를 자처하고 있다. 부처님은 절대자로서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존재가 되어 있고 스님은 그 권한을 대행하는 존재로서 재나 기도를 주관하고 있으니 이 시대의 불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오신지 2556년, 올해 부처님오신날도 절마다 환하게 등불을 켜서 세상을 밝히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밝혀야 한다는 의미의 등을 켜는 것은 아닌듯하다. 성직자를 자처하며 재를 주관하는 일에 정신을 파는 스님들이 대부분인 절에서 무명을 밝히려는 수행의 분위기가 있을 리 없으니 액면가가 매겨진 등불이 아무리 밝다고 한들 마음의 어두움인 무명을 없앨 수는 없지 않을까? 일 년 내내 불을 켜서 복을 빌어준다고 하며 전각 안에 빼곡하게 달아 환하게 불을 켜는 수많은 등이 어떻게든 '빈자일등'의 의미와 닿아 중생의 무명을 밝힐 수 있어야 할 것인데. (2012,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