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나는 부처다

금강경 독송으로 아상을 극복하다

무설자 2010. 11. 8. 15:48
728x90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불교학생회에 가입하면서 맺게 된 불교와의 인연이 이제는 내 삶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변에서도 나를 대하기를 유발승이라고 할 정도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런대로 잘 지녀왔다고 볼 수 있을까? 종교가 없던 이들이 나와 인연을 맺어 불교에 입문하는 경우도 많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변에 전하는 가장 쉬운 길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라 믿는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교리를 배우거나 기도에 의지하는 것과 함께 수행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리라. 교리를 배우면서 입문하는 단계를 지나면 절대적인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기도라는 신행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까지가 다라면 불교가 다른 종교와 크게 차별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불교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타고난 자신을 바꾸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바꾼다는 말을 다른 말로 풀자면 팔자를 바꾸는 것이다. 타고난 성격이나 주어진 현실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쫓아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고 생각한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교리공부에 매달려 학교 공부 반, 경전 공부 반이라고 할 만큼 책을 통해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학생회, 청년회 법회에서 경전을 강의하고 따로 경전 공부반을 만들어서 일요일 아침마다 강의를 하며 불교를 다 아는 사람인양 떠들었으니 아상이 하늘을 찔렀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러던 중에 아버님이 암3기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 때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고 이 문제 해결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단서를 들고 의사인 친구 형님을 찾아뵈니 나을 가능성이 없으니 병원에 의지하지 말고 환자의 고통을 줄여 편안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길이요 생명이라고 떠들었지만 아버님의 병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한 나의 아만은 여기서 끝이 났다. 머리에 꽉 찼던 지식에 불과한 불교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음 단계가 바로 기도였다. 그 때 만나게 된 것이 금강경독송회였다. 하지만 기도의 목표는 아버님 병의 쾌유가 아니었다. 아침마다 출근길에 법당에 들러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세운 원은 아버님의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친구 형님이 권한 처방은 환자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진통제를 구해 고통이 심할 때 쓰라는 것이었다. 그 진통제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기도를 하면서 주변의 지인들을 만나 약을 구하는 청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간처방에 의지해서 그 병에 맞는 조약을 찾는 일이었다. 원이 이루어진 것일까? 귀한 진통제를 구할 수 있었고 6개월 정도 사실 수 있을 것이라던 진단과는 달리 두 해를 넘겨 구했던 진통제를 마지막으로 맞으시던 그 날 아버님은 운명하셨다.

 

내가 처한 문제를 해결해달라며 부처님께 의지했지만 해결사 노릇을 해주십사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아상을 지우고 인상을 타파하며 중생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원을 굳건하게 세울 수 있었다. 수자상을 바로 알아 아버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의연함을 유지하여 올바른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마음이 흔들릴 때면 기간을 정하여 아침이면 금강경을 독송하고 하루를 여는 힘을 얻으며 저녁에는 108배로 나를 돌아보며 지난 시간을 비추어본다. 나를 세워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초처럼 세상을 떠돌 듯 흔들릴 때 수행은 닻이 되어 나를 안정시키고 굳건한 원력은 해야 할 일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때를 기다려 결과를 받아들이게 한다. 수행하지 않는 불자는 팔자를 바꿀 수 없으니 어떻게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圓成 51)

                                    

 

법보신문 2010, 11, 3 -나의 발심수행란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