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이야기

화엄매, 고불매, 선암매...그리고 우리 차

무설자 2024. 3. 2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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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차 이야기 240325

화엄매, 고불매, 선암매... 그리고 우리 차

 

 

얼마 만에 나서는 아내와의 여행길인가? 코로나 사태로 발이 묶였었다는 건 핑계일 뿐이라는  아내의 푸념은 휴일 집돌이인 나를 향한 꾸지람이다. 아내가 눈총을 주면 떠밀리다시피 집을 나서서 가는 곳이라야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인 통도사이다.     

 

동료 건축사이자 대학 후배인 P에게 차 생활을 전도해서 그와 가끔 찻자리를 가졌다. P는 한 사무실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대학 후배인 데다 건축사라는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따로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P에게 차 생활을 권해 그가 차를 마시게 되면서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P는 사무실을 접고 감리 일을 하게 되면서 부산을 떠나 광주에 현장이 생겨 3년간 머물게 되었다. P는 주말과 휴일이 되면 광주 인근의 절과 고택을 찾는데 월요일이 되면 그 주에 돌아본 곳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받고 통화를 하면서 봄이 되면 남도 여행을 해보자고 했던 말을 실행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화엄사는 언제 다녀왔는지 기억도 잘 나질 않는데 그가 찍어서 보내온 홍매 사진을 보고 길을 나설 마음을 먹게 되었다. 화엄사는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기억으로 가끔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이는 절이었다. 그 절에 홍매가 유명해서 자주 사진으로 보았는데 올해는 화엄사 달력을 얻게 되어 3월 페이지가 만개한 화엄매였다.

    

꽃은 시기를 놓치면 나무 밖에 볼 수 없으니 미룰 수 없는 게 탐매 여행길이다. 붉다 못해 검붉어 흑매라고도 하는 화엄매가 80% 정도 피었다는 사진을 P가 보내온 터라 나들이 일정을 잡았다. 모처럼 나서는 일박 여행이라 아내도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화엄매     

 

화엄사로 가는 길이 옛날에는 하동을 거쳤는데 지금은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부산에서 세 시간 정도에 닿았다. 화엄사 아래 상가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후배가 반차를 내고 도착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절을 찾아온 사람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떠올린 화엄사는 예전과 달리 중창불사가 많이 이루어져 엄청 큰 절이 되어 있다. 이번 나들이는 절을 찾아왔다기보다는 화엄매를 보러 온 것이나 다름없으니 대웅전과 각황전에 들러 삼배만 올렸다. 화엄매는 지난주 후배가 보내준 사진으로 본 상태에서 꽃이 더 많이 피지는 않아 보였다. 화엄매는 흑매라고도 부르는데 붉다 못해 검붉은 꽃이 특별한 매화로 돋보인다.     

 

 

사진작가들의 작품으로 봐왔었던 화엄매를 실물로 보니 살짝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화엄매는 올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백양사의 고불매, 선암사의 선암매, 오죽헌의 율곡매와 함께 천연기념물 지정 매화로 우리나라를 대표한다.     

 

대웅전 뒤에 들매가 또 다른 명성을 가지고 있어 찾아갔다. 들매는 나무의 자태나 꽃은 볼품이 없지만 사람 손으로 심지 않고 새가 매실을 먹고 그 씨앗을 떨어뜨려 자연적으로 자란 나무라고 한다. 들매는 백매였는데 볼품없는 상태라 묘목을 심어 대를 이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고불매     

 

화엄매를 보고 다음 행선지를 정해야 했는데 후배가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3대 매화를 보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내었다. 고불매가 있는 백양사와 선암매가 있는 선암사가 멀리 있지 않으니 그 코스로 돌아보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지었다. 백양사 가는 길에 산수유 마을을 거쳐 봄꽃을 즐기는 여행의 흥취를 더하기로 했다.     

 

구례 산수유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될 만큼 정취가 아름다웠다. 마을 가운데로 개울이 흐르는데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과 만개한 산수유가 선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상 기온 때문에 남도길이 아직 봄꽃을 보기 어려웠는데 산수유마을에 오니 봄이 여기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시간이 벌써 오후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어서 서둘러 백양사로 길을 잡았다. 전국에 유명 사찰은 거의 다 가보았는데 백양사는 초행길이다. 산수유마을에서 거의 한 시간 거리라 비가 올 것 같은 하늘도 길을 재촉하게 했다.     

 

백양사는 절까지 올라가는 길에서 환희심이 일었다. 산세도 좋거니와 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 절의 초입에 계곡물을 막아 만든 보의 물에 비친 쌍계루의 정취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난 절은 인적이 없었는데 고불매가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분홍색 매화가 만개한 고불매는 절 한쪽에 비켜서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꽃이 피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꽃이 지고 나면 고목 한 그루의 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화엄매는 나무의 키 높이로도 존재감을 드러낼 만 한데 고불매는 350년의 오랜 세월을 가만히 담고 있을 뿐일 듯했다.     

      

선암매     

 

후배가 머물고 있는 광주에서 묵었는데 호텔까지 잡아 주니 칙사 대접을 받은 셈이다. 다우로 정을 주고받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의 숙소에서 차를 나누어야 마땅했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아내와 함께 가는 게 어려웠다. 후배에게는 아끼는 차 한 편을 선물해서 다정을 표했다.    

 

다음날은 선암매가 있는 선암사를 가기 전에 화순 쌍봉사를 찾았다. 쌍봉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목탑 형식의 전각으로 이름을 가졌으나 실화로 전소되어 안타까움을 가지게 한다. 지금은 복원해서 사격을 유지하고 있는데 절은 평지 사찰로 차분한 분위기로 느낌이 참 좋았다.   

  

쌍봉사의 창건주인 철감선사 부도와 부도비가 있는 자리로 오르는 길 옆에 차밭이 있었다. 차나무가 수십 그루 자라고 있었지만 따로 돌보지는 않아 보였다. 차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면 여느 나무와 다르게 보지 않겠지만 차나무가 있어서 반가웠다. 쌍봉사는 초의스님이 이십 대에 머물렀는데 철감선사 부도로 오르면서 그가 처음 읊었다는 시가 적힌 현판이 차밭 입구에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차인을 대표하는 초의스님과 인연이 닿는 곳인데 차 한 잔 할 곳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가윗날 새벽에 앉아서   

  

북창아래서 졸다가 깨어나니

은하수는 기울고 먼동이 터온다

에워싼 산은 가파르고도 깊은데

외딴 암자는 적막하고 한가하구나

밝은 달빛은 누대에 들어서고

바람은 산들산들 난간에서 인다

침침한 기운은 나무들을 감쌌고

찬 이슬은 대나무 마디에 흐르네

평소 조심했으나 끝내 어긋났으니

이런 때 맞으니 도리어 괴로워라

남들이야 이 심사를 알 리 없으니

싫어하고 의심함 사이 피할 길 없네

어찌 미연에 막지를 못 했던가

서리 밟는 지금 오한이 이는구나

보나니 동녘은 점차 밝아오고

새벽안개는 앞산에서 피어난다

 

쌍봉사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려 선암사에 도착했다. 선암사도 다녀온 지가 언제였던가 기억이 없다. 그때는 선암매가 있는지도 몰랐으나 누가 오더라도 봄에 꽃이 핀 때가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선암매는 화엄매나 고불매와 다르게 매화 군락지처럼 주변이 온통 매화가 만개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한 그루가 독야청정하고 있는 화엄매나 고불매와 달리 선암매는 다른 세상에 온 듯이 고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기와 전각과 돌담을 배경으로 매화나무를 잘 가꾸어 선암매 혼자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니 편안하지 않겠는가? 봄의 선암사는 매화가 만발하면 극락정토에 와 있는 분위기가 되겠다.  

        

쌍봉사에서도 그랬지만 선암사는 차나무가 절 주변에서 많이 자라고 있다. 특히 선암사는 야생차 체험관을 제법 큰 규모로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암사 차맛이 궁금하여 들렀는데 매화차 등의 대용차를 판매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선암사 야생차 체험관이라는 건물 이름에 걸맞게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다관이나 차실을 운영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다. 우리 차의 현실과 미래를 이런 분위기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 암담할 따름이다. 선암사는 큰 절 중에서 고졸한 분위기로 관광지화 되지 않아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또 제법 큰 차밭을 가지고 우리 차의 명맥을 이어 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크게 실망하고 돌아선 길이 되었다.     

 

후배와 함께 화엄매를 찾아 길을 나서서 고불매와 선암매를 덤으로 보게 되어 나도 아내도 아주 만족한 여행이 되었다. 특히 백양사와 선암사는 절을 찾아 오르는 길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내는 계절마다 다시 오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으니 머지않아 다시 길을 나서게 될 것이다.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