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단독주택 양산 지산심한

단독주택 知山心閑, 설계를 마무리하며 남는 아쉬움--단독주택은 실내와 마당이 모두 집인데

무설자 2021. 3. 2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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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 知山心閑, 설계를 마무리하며 남는 아쉬움

-단독주택은 실내와 마당이 모두 집인데
 
지산심한의 설계가 지난한 일정을 지나 마무리되었다. 서른 평이라는 규모가 면적으로 보면 작은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나 건축주의 여생을 담아야 하니 한 치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럴 것이라는 관념의 얘기가 아니라 건축주와 설계자는 8개월에 걸쳐 보완에 보완이 이루어져 끝낼 수 있었다.
 
집의 얼개를 잡는 기본 작업은 설계자에 대한 건축주의 깊은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잘 진행이 되었다. 내가 그동안 서른 채에 가까운 단독주택 작업으로 축적된 노하우가 잘 적용된 기본 얼개는 건축주의 바람은 물론 대지 조건에도 잘 어우러졌다. 이대로 좀 더 디테일한 부분만 다듬으면 좋은 집이 될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기본 얼개를 잡아내는 과정까지는 순풍에 돛 단 듯했다. 그런데 안을 다듬어 들어가는 마무리 단계에서 암초에 걸린 듯 앞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사용자와 설계자의 의견이 갑론을박 지루한 공방전에 들어야 했었다.
 
설계자와 건축사, 건축주와 사용자
 
건축설계를 비용대비 수익을 창출하는 일이라고 보면 건축주의 의견을 잘 수용하면 작업 기간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 건축사는 건축주뿐 아니라 사용자까지 배려한 공동성을 생각해야 한다. 건축물이 지어지고나면 건축주와 설계자는 없어지고 사용자와 건축사가 남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일의 마무리가 쉽게 될 수 없다.
 
설계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건축주와 설계자의 의견 차이는 주로 어떤 부분에서 발생될까? 건축주는 우리가 살 집이니 이렇게 해야 되겠다는 주장을 하고 건축사는 집이라는 큰 범위에서 그렇게 하면 문제가 있다고 조정하자고 얘길 한다. 건축주가 얘기하는 ‘우리’는 사실 식구의 범위가 아닌 개인이며 건축사는 보편성에 근거한 ‘우리’라고 봐야 한다.
 
개인의 생각이 적극적인 건축주는 손수 그린 스케치를 들이밀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애쓰기도 한다. 그럴 때 허가만 내어주면 임무를 다한다고 여기는 ‘설계자’라면 굳이 논쟁을 벌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백년가百年家를 지어야 한다는 소명을 가진 ‘건축사’라면 집이 가지는 공동성을 담아 적극적인 조정에 임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실에서 마당으로 열리는 문을 창으로 내기를 바라는 건축주
 
지산심한의 설계가 마무리 되는가 했는데 설계자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변경사항이 생기고 말았다. 거실에서 마당으로 열리는 문을 창으로 변경하는 요청을 해 온 것이다. 거기다가 거의 모든 창을 여닫을 수 없는 고정창으로 바꾸자는 주문이 함께 들어왔다.
 
건축주는 점점 중국에서 날아드는 황사 등으로 나빠지는 공기질과 봄철에 날리는 송화가루가 집 안으로 날아드는 것을 염려했다. 또 거실에서 창 프레임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내다보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했다. 또 창이나 문의 틈새에 먼지가 앉는 것도 싫어서 여닫는 창이 없는 고정창으로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지산심한은 환기장치가 되어 있어서 실내의 공기상태는 외기 상태와 같이 유지될 수 있다. 24시간 필터를 거쳐 들어온 공기가 순환되는 환기장치가 가동되기 때문이다. 건축주의 간절한 바람에 의한 요청을 설계자의 의도라는 얘기로 거부할 수 없었다.
 

지산심한의 거실영역은 사랑채에 해당되니 마당과의 연계가 매우 중요하다. 넓은 유리문은 외부공간과의 소통되는 장치이다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마당, 이 유리벽은 내외공간을 구분짓는 장치일 뿐 시각적으로 하나의 공간체계를 가진다.
거실은 사랑채의 역할을 하기에 마당과 하나의 공간체계를 이루도록 설계가 이루어졌다. 거실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거실로 문으로 이어지는 일상 생활이 자유로워야 집에서 보내는 하루가 정체되지 않고 생기가 넘치게 된다. 그런데 창문으로 바뀌게 되면서 설계자의 의도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단독주택의 창과 문의 역할
 
우선 집에서 늘 머물게 되는 은퇴 이후의 일상을 감안해보자. 집이라는 영역을 건물 안으로 한정하면 환기장치에 의해 쾌적한 공기 상태가 유지되면 그만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집을 쓴다면 아파트의 생활과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본다.
 
단독주택이 아파트와 크게 다른 점은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연계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게다가 전원에 짓는 집이라면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나무와 풀내음이 담긴 바람이 거실로 넘나든다. 산새 소리와 풀내 담긴 바람은 열린 창으로만 들어올 수 있다.
 
거실은 옛집에서 사랑채에 해당된다. 사랑채에는 방과 마루를 잇는 문은 들어열개문을 설치했다. 여름에는 문을 들어 올려서 고정하면 방과 마루가 하나 되어 바깥으로 열린 공간으로 썼다.
 
안채의 대청마루도 안과 밖의 경계가 따로 없는 열린 공간이다. 우리나라의 옛집은 마당과 처마아래, 대청과 방으로 중중무진의 공간이 겹치면서 내외부가 하나의 공간체계를 가진다. 여기서 문은 개폐의 기능으로 공간을 가르거나 막는 장치를 하게 된다.
 
 
 
아, 지산심한은 문을 없애고 고정창을 두면서 거실과 마당의 흐름이 벽으로 막혀 버렸다. 방은 열리지 못하는 고정창으로 닫히면서 바람도 새소리도 들지 못하는 적막한 공간이 되었다. 옛집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공간체계를 담아내려던 설계자의 구상도 사라져버렸으니 애절하고 안타깝다.
 
내가 살 집이기에 가지고 싶은 건축주의 바람은 이루어졌을지 몰라도 그 선택에 기뻐할 수 없으니 설계자의 아픔을 어찌할까. 단지 문이 창으로, 여닫는 창을 고정창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왠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내가 살 집이 아니나 백년가는 한 사람이 주인일 수 없으니 그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무 설 자
 
무설자(김정관)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들어서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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