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이야기

극락에 이르는 길이 없는데

무설자 2018. 9. 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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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설자의 에세이 차 이야기 1809

극락에 이르는 길이 없는데

 

 

통도사 극락암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스님께서 스님을 찾아온 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극락에 이르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고?”

 

그 이는 스님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극락암까지 길이 잘 닦여져 있어 편히 왔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극락과 그 이의 대답 속의 극락암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길이 없는 극락과 잘 닦여진 길이 있는 극락암,

극락은 길이 없어 가기가 어렵고 극락암은 차로도 올 수 있게 큰 길이 잘 나 있으니 아무라도 올 수 있습니다.

극락암에 계시던 경봉스님을 친견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극락에 이르는 길을 아는 이는 몇이나 있었을까요?

 

 깊은 산 중의 절은 인적이 닿기가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가 없던 시절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큰 길에서 내려 한나절씩 걸어가는 게 예사였습니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서 내도 건너고 급한 경사 길을 숨이 턱에 닿으면 쉬어갑니다.

그러면서도 멀다하여 불평하는 이 없이 부처님을 찾아  갔습니다.


먼 길을 걸어가는 것도 수행이라며 절에 닿으면 그곳이 바로 극락이었습니다.

찾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이 극락이지만 극락암이라 이름을 붙은 곳에 닿았다고 해서 극락일 수 없지요.

그러니 어쩌면 옛날에는 찾아가는 절마다 극락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흔했던 극락이 차가 올 수 있도록 찻길이 나면서 극락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간절히 찾는 마음은 간데 없이 차가 데려다 주는 그곳은 이름이 극락일지라도 극락일 수 없겠지요.

그러다보니 극락 같은 극락암도 이제는 이름만 극락인 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극락처럼 장엄하게 꾸며놓은 절은 많아지고 있지만 하루 길에 열 곳도 갈 수 있는 그런 극락은 없으니...

 

 깎아지른 벼랑에 붙어있듯이 세워진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 닿기 위해서는 몇 백이나 되는 계단을 밟고 또 밟아서 올라야 합니다.

그 계단은 반듯하게 만들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주변에 있는 돌을 생긴대로 갖다 놓았기에 한 단 한 단 잘 밟지 않으면 딛고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한 발자국 발을 내려놓을 때 마다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마음을 딴 데 두고 발걸음을 놓았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입니다.

한 단 딛고 나무아미타불, 또 한 단 딛고 나무관세음보살, 또 한 단 딛고 나무석가모니불, 다음 단을 딛고는 나무지장보살입니다.

이렇게 몇 백 단일지 모르는 계단을 딛고 절에 이르면 이미 그 마음은 극락에 있는 듯 편안해져 있습니다.

 

그렇게 계단으로 만들어진 험한 길은 없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오르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한걸음 길 만들고 나무관세음보살, 또 한걸음에 만든 길에 나무아미타불이니 걸음마다 불보살을  만나면서 오릅니다.

극락에 길이 없으니 만들어 가면서 올 수 밖에 없었던 셈입니다.


내려가는 길에는 걸음마다 부처님도 내려놓고 보살님도 내려놓습니다.

험한 길을 오르며 찾았던 불보살님이었지만 이제는 집으로 가는 길에는 채우려 했던 것을 내려 놓은 빈마음입니다.

길을 알고 나면 길잡이가 없어지듯 찾고 나서 비우면 그 마음이 극락이라  발걸음과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인생도 알고 보면 그렇게 험한 계단을 오르는 것 같습니다.

행복, 열반, 깨달음이라고 일컫는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삶의 여정이라는 계단을 올라갑니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은 결코 편한 길일 수 없을 텐데 사람들은 계단이 아닌 편안한 길을 찾습니다.


삶의 목적지는 벼랑 위에 있는 작은 절 같아서 험고 급한 돌계단을 한발 한발 마음을 모아야만 닿을 수 있습니다.

목표를 향한 길을 외면하고 편한 길을 찾다보면 그 길은 내가 택한 길일 뿐 목표로 향한 길은 아니기 십상입니다.

요즘 절은 관광버스가 대웅전 코앞에  넓디넓은 주차장을 만들어 놓고 참배객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절을 하루에 몇 곳을 돌아보는 것은 관광길일 뿐이지요.

한 군데를 가더라도 내 발로 찾아들어 마음을 가다듬고 삼배를 올려야만 부처님을 만나는 올바른 참배길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왜 편하게 살 수 있는 왕궁을 버리고 거칠고 험한 출가사문의 길을 택하셨을까요?

그것은 오로지 그 길만이 찾아야 될 삶의 의미를 향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가야할 길이 아닌 편한 길만 쫓아가는 것은 결국은 걸어 간만큼 되돌아 와야 합니다.

어쩌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극락으로 가는 길은 오로지 한발 한발 내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경봉스님이 던지신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


 “극락에 이르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가려 하는고?”                                (2013, 6, 11)

 


차를 마시며 글에 덧붙여서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그렇지 않을런지요?

단지 차맛만 얻으려 좋다는 차를 골라서 우린다고 해도 내가 기대했던 그 맛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게 되더이다.

찻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정갈한 다구에 물을 붓고 차가 잘 우러나길 기다리는 시간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차를 잔에 부어 담아 내면 그 맛과 향은 무심하게 다가올 뿐입니다.

 

바라는 맛과 향이 아니라는 투정은 과정을 염두에 두지않고 내 욕심에 차지않는다는 결과만 따지는 거지요.

더 좋은 차에 비한다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보다 못한 차와 비하면 늘 좋은 차를 마시게 됩니다.

물론 차에 대한 높은 식견으로 잘 우려낼 수 있는 능력이 더해지면 같은 차라도 더 맛있게 마실 수 있겠지요.

 

차보다 차가 주는 정서를, 차에 대한 평가보다 잘 우려내려는 정성을, 차맛에 대한 토론보다 찻자리에 어울리는 다담을 나누며 차를 마시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만드는 찻자리가 늘 만족스러운 것은 다우들이 차를 대하는 마음이 찻자리의 정서에 지극한 분들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다우들과 마시는 차 한 잔의 자리는 늘 극락이 됩니다. 


 " 적은 것에 만족하는 마음으로 차 한 잔 마시니 극락에 이르는 길이 거기에 있더이다"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