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보여서 구입한 주변이 비어있던 땅,
주변의 집이 지어졌을 때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 땅을 더 확보해 바다가 늘 집이 되게 했던 집,
가슴 설레던 시작은 집이 지어지고 나서 다시 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지금도 돌아보면 지난 시간이 그리워지는데 왜 그 집을 다시 가보지 못하게 되고 말았을까?
건축주가 아우가 되고 설계자인 내가 형이 되었던 아름다운 만남,
그러나 집은 설계대로 지어지지 못했고 우리의 인연도 삭아들고 말아 가슴 아픈 단독주택 설계 이야기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사무실을 낸 지 스무 해나 되었지만 나의 수주(受注) 자세는 처음처럼 여전한 강태공 스타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일을 가져다주지 않는데도 영업이라는 걸 제대로 하지도 않고 사무실을 꾸려가고 있다. 사람 사귀는 데는 그만한 것도 없다는 골프는 고사하고 바둑, 장기, 당구도 칠 줄 모르니 사업가로는 완전 젬병인 셈이다. 그러면서 수익성이 없는 경영방식으로 여태껏 버텨올 수 있었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아이러니하다.
강태공 스타일이 내 수주 방식이라고 했지만 역사 속의 강태공의 출중한 능력에 비한다면 게으른 천성을 탓할 수밖에 없다. 강태공은 주군을 기다릴 명분이 있었다지만 내세울 것도 없이 내가 필요하면 쓰라는 똥배짱으로 이 험한 수주환경에서 용케 살아남아있다. 어떤 주군인지도 모르면서 마냥 기다리기만 했었다면 천사 같은 아내도 벌써 낚싯대를 분질러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건 나의 낚시터를 찾아 일을 의뢰하는 주군이 적지 않아서 아직도 강태공 노릇으로 일터를 꾸려가고 있다.
나를 찾아 주는 주군 중에 나의 알량한 재주를 필요로 하는 그룹은 단독주택을 지으려고 하는 이들이다. 그동안 스무 채가 넘는 단독주택을 설계했었으니 그만큼 기억에 남는 건축주도 많다. 그중에 첫 만남에서 한 시간도 채 안 되어서 건축주의 제의로 내가 형이 되는 형제의 의를 맺고 설계를 진행했었던 일이 있었다.
내 지인의 매제인 건축주는 직업이 치과의사였는데 그 도시의 치과의사회 회장을 역임했던 명망 있는 분이었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고 주택에 대한 내 생각을 한참 이야기하던 중에 그가 내 말을 끊으며 이렇게 말했다.
“건축사님, 잠깐만요.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이제부터 제가 형님으로 부르도록 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만난 지 삼십 분 만일지라도 숙명같이 연인은 한눈에 반한다니 그럴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건축주가 설계자를 형이라 부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황당한 제안으로 당황스러운 상황을 만들어가며 내게 그가 살 집의 설계를 부탁한 연유는 이러했다.
그의 직업인 치과의사는 스트레스를 받는 직업 중에 손꼽을 만큼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의 얘기를 들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부모님과 혼자된 형님과 조카까지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3.5 세대가 한 울타리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남자가 쉰이 넘으면 아내와 잘 지내며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낮에는 병원에서, 밤에는 가족들로 인해 집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며 깊은 한숨을 지으며 얘기를 계속했다.
그가 쉴 수 있는 집은 어디에도 없으니 단독주택을 지어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식구들과 함께 살면서도 그가 편히 쉴 수 있는 집, 그를 옭아매고 있는 일과 가족들로부터 쉴 수 있는 집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집을 설계해 낼 수 있는 건축사를 찾아야 한다는 게 벽에 막혀 있었다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나를 만나 그의 인생숙제를 넘기게 되었다며 안도의 긴 숨을 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건축주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자리에서 건축주가 설계자인 나를 형으로 삼게 해 달라는 제안은 내 입장에서 나쁠 건 없었다. 그렇지만 그 파격적인 제안은 그의 고민을 확실하게 내게 넘기기 위해 형제의 제안을 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제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그의 형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맡게 되는 셈이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곱씹어보니 나의 속내는 다르게 잡힐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내게 좋은 건축주가 되어 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서로 필요충분조건이 맞아떨어지는 것이리라. 내가 바라는 건축주란 설계자인 나에게 가능한 한 작업 시간을 충분히 주고 그에 따른 보수를 지불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 기획안과 함께 견적서를 들고 설계 계약을 위해 두 번째 만남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 만남에서는 내가 그의 형이 되었으므로 그가 만족했던 자리였다면 이 만남은 내가 만족하기 위한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설계 기간은 2년으로 그가 제안했었던 만큼 충분했었고 내가 바라는 설계비로 결정된다면 이상적인 건축주와 일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준비한 설계비 견적서에는 일반적인 건축주라면 부담이 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물론 그 금액은 내가 주택설계비로 늘 제시하는 기준에서 약간 상회하는 정도였다. 다른 종류의 프로젝트는 경쟁구도에서 설계비를 제시하게 되지만 주택만은 나의 설계비 기준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준비했던 설계 기획안을 설명하고 조심스레 견적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견적서는 열어보지도 않고 그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 견적서는 보지 않겠습니다. 준비된 계약서에 금액을 그대로 적으시면 제가 도장을 찍겠습니다. 제가 형님으로 모시며 저의 고민을 얹어 드리는데 설계비는 당연히 형님이 정하시는 대로 드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백지수표처럼 백지 계약서를 받은 셈이었다. 잠깐 생각을 하고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 견적서에 적었던 금액보다 적게 기입하고 계약을 맺었다.
내 스스로 견적서에 적었던 금액보다 낮췄던 것은 그의 말에서 진정으로 나를 형을 필요로 하는 마음을 읽었기에 형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설계 기간 2년 동안 그도 부산을 몇 번이고 다녀갔었고 나도 그를 찾아 협의를 해가면서 우애라 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정을 많이 나누었던 시간이었다.
. 대지는 산을 깎아 조성한 택지의 가장 높은 자리를 골라 바다를 볼 수 있는 땅으로 선택했었다. 그렇지만 5미터 아래의 앞의 땅에 집이 다 들어서면 바다 조망은커녕 전후좌우가 다 막혀 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으로 검토되었다.
만약에 다른 건축사가 설계자였다면 이런 정황을 알게 되었더라도 일이 중단되는 것을 우려하여 설계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건축주의 의도를 담아내기는커녕 조망도 일조도 다 막히는 단독주택의 기본적인 가치마저 없는 집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대지의 여건을 그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추가로 앞의 대지를 구입할 것을 권했다. 다행스럽게 그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여 대지가 추가로 확보되었다. 이제는 바다로 조망이 열리고 햇볕이 잘 드는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2년이라는 충분한 설계기간에 우여곡절이 담기면서 대안에 대안이 거듭 검토되어 설계자인 나도 건축주인 그와 그의 식구들도 만족하는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여기까지는 설계자로서, 형으로서의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었다.
.
다음 단계는 집을 잘 지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마침 적합한 분이 선정이 되어 한숨을 돌리나 싶었다. 하지만 그해 여름은 염천으로 악천고투를 거쳐야 했고 현지의 작업자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10개월이라는 공사기간을 가졌지만 지어진 집은 나도 그도 만족하지 못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집이 지어지는 과정에서 그가 배제된 그의 가족들이 공사에 개입하면서 크고 작은 변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집의 얼개는 유지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거실과 바다로 향해 열린 데크가 훼손되어 버렸고 외부 마감도 벽돌과 돌에서 흰색 스타코와 페인트칠로 바뀌어져 버렸다. 설계의 얼개가 흐트러지니 집에 대한 개념은 이미 빛이 바래지고 말았다. 그와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바라던 좋은 집과는 거리가 있는 결과에 형제결의가 빛이 바래진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를 집으로 가져와 당호를 관해헌(觀海軒)이라 붙였지만 시공과정에서 변경이 되어 버려 완공된 집을 사진으로 보여줄 수 없게 되어버렸다. 내가 소개해서 공사를 담당했던 시공자와 내 집이니 변경을 해도 되지 않느냐는 건축주 가족 간의 갈등은 조정되지 않았다. 결국 시공자는 집을 끝내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건축주와 나 사이도 처음에 가졌던 마음이 간 데 없이 되고 말았다.
내 입장에서는 허무하게 지어지고 말았던 그 집을 보기 위해서 다시 찾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짧은 시간이었으나 아우라고 불렀던 그가 그 집에서 병원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내며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와 응급결에 맺었던 호형호제의 인연도 이제는 빛 바랜 추억이 되어 버렸지만 아우를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건 기억해 괜찮은 설계자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15.3.9)
무 설 자
무설자(김정관)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들어서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메일: kahn777@hanmail.net
전화: 051-626-6261
'집 이야기 > 도반에서 지은 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독주택, 밀양 무릉동 이안당怡顔堂을 오랜만에 들르니 (0) | 2019.10.14 |
---|---|
화목한 식구들의 웃음이 담장을 넘는 집, 기장 양화당養和堂 (0) | 2015.06.29 |
가을에 다시찾은 양명재-전원주택에서 즐기는 삶 (0) | 2013.10.07 |
건물에 새 생명 불어넣기, 리모델링-에피소드 인 커피 (0) | 2013.04.08 |
햇볕과 조망을 나눠 즐기며 사는 전원주택 - 양명재 (0) | 2013.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