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자의 에세이 고찰순례
영광 모악산 불갑사
-백제 초전 가람-
모악산 불갑사
불갑사(佛甲寺)는 호남(湖南)의 명찰(名刹)로 유서(由緖)깊은 고찰(古刹)이다.
삼국시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존자(摩羅難陀尊者)가 남중국 동진(南中國 東晋)을 거쳐 백제 침류왕 1 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모악산에 최초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이 절이 제불사(諸佛寺)의 시원(始原)이요 으뜸이 된다고 하여 불갑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옛 백제지역의 고찰(古刹)을 대부분이 백제가 멸망되면서 백제서기가 유실되어 그 창건역사를 고증할 수 없는 것처럼 완벽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어렵지만, 불갑사 고적기(古蹟記)에서 불갑사의 최초 창건을 "羅濟之始 漢魏之間"이라고 하여 불갑사가 백제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과, 이 지역에 전해내려오는 구전(口傳)과 지명(地名), 사명(寺名), 그리고 마란난타존자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서 어느 정도의 확신은 가능하다.
마라난타존자가 최초 상륙했다는 법성포(法聲浦)의 백제시대 옛 지명은 아무포(阿無浦)로 불리웠으며, 고려시대 부용포(芙蓉浦), 고려말 이후 법성포로 되었다.
아무포는 나무아미타불의 음을 함축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이는 마라난타존자가 중국에서 백제에 당도할 때 아미타불상을 모시고와 처음 도착한 포구가에 모셔 놓았었다는 구전과 마라난타존자가 극락정토신앙과 염불을 중심으로 불법을 교화했었다는 점, 그리고 인도스님에 의한 백제포교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쪽 설화는
(살아있는 몸을 가진 아이타 여래가 천축에서 교화를 마치고 백제로 날아와 내전 위에 나타나 눈부신 빛을 내어 궁중을 다 비추니...용안이 빛을 잃고 신하들이 혼비백산하였다. 이때 여래가 군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근신하지 마라. 너희 왕이 옛날 천축에서 월개 장자로 있을 적에 극락세계의 나를 청하여 공경하고 공양하였기에 지금 이 나라 임금이 되었으나 향락에 빠져 주야로 악업을 지어 3악도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를 제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느니라..."
그 뒤 큰절을 지어 여래를 받들게 되니 비구들이 별같이 절 안에 늘어서서 주야로 경전을 외고 군신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 조석으로 그 명호를 불렀다. 온 나라 백성들이 오랜 세월 공경하며 예배하였다)
선광사 연기(善光寺 緣起)의 기록을 볼 때 마라난타 스님은 포구에 상륙한 후 아미타불 정토신앙을 전파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아무포라고 불리다가, 불법을 꽃피웠다는 의미의 부용포, 뒤에는 더 명확하게 성인이 불법을 전래한 포구라는 의미의 법성포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고려 태조 때부터 불리우게 된 영광(靈光)이라는 지명은 우주법계와 억만생령이 본래부터 함유하고 있는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한 아미타불을 다른 말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이며, 영광이라는 말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지명도 불교 명칭이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오자 왕이 교외로 나가 궁궐안으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백제불교가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 한산에 사찰을 세우고 열명을 출가 시켰다."
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보아야 할 것은 마라난타존자는 공식적인 국가적 전교사절로 온 것이 아니라면 국왕이 처음부터 마라난타존자를 영접했다고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에 당도하여 영광의 법성포 및 불갑사 지역, 나주의 불호사 지역 등 남쪽지역에 교화의 발길을 재촉한 뒤에 당시의 수도인 한산으로 향해 온다는 이야기를 국왕이 듣고 나서 궁궐로 영접해 들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삼국사기에서는
"마라난타존자는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불에 들어가도 타지않으며 쇠붙이나 돌로 변신할 수 있는 등 무궁무진하게 화현(化現)하였다."
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에서는
"신통한 이적으로 사물에 감통(感通)하니 그 변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사방으로 돌아 다니는데 뜻을 두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교화의 인연이 닿는 곳이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나서서 갔다."
라고 하여 마라난타존자의 신통력과 불법전파의 열정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나주 불호사의 상량문과 단청기에는 마라난타존자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마라난타존자가 법성포로 상륙하여 불갑사와 불호사를 창건한 후 한산으로 올라가 불법을 전파했다고 전래 되어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간접적 고증자료 이기도하다.
마라난타존자의 불법전래 후 392년 백제 아신왕은 불법을 믿으라는 교령을 전국적으로 내리게 된다.
그 후 약 140년간 불법에 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미륵 불광사 사적의
"백제 성왕 7년(526년)에 겸익이 인도에서 배달다삼장과 함께 범어(梵語)원전 논장(論藏(아비달마))과 5부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왕은 나라안의 명승 28인을 소집하여 겸익법사와 함께 율장 72권을 번역하게 했다."
는 점과, 조선도교사(이능화著)의
"백제에서는 고구려와 달리 도교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하여 승려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고 하는 기록을 통하여 백제시대에 불교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역시 불갑사도 백제 말기까지 여전히 사원의 역할을 유지하고 수행교화의 도량으로 융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할 때 영광지역의 저항이 거세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불갑사도 전화를 면치 못하고 쇠폐했었으리라 짐작된다. -불갑사 홈페이지에서
법성포에서 점심을 먹고 이번 고찰순례의 가장 중요한 순례지인 불갑사로 향했다.
백제불교의 초전가람답게 잘 단장된 불갑사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외관만으로 본다면
아직 호남에도 불교의 명맥이 잘 유지 되고 있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주차장에서 개울을 따라 한참을 걸어 한반도 최초의 사찰을 찾아 들었다
토요일인데도 이렇게 한산하다니 관광객도 없는 산사는 그야말로 적막했다
불자가 없다시피한 호남의 불교세를 짐작할 수 있어 마음이 착찹해져옴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이 시대 대가람으로 부활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시대의 종교로서 융성한 부활이라면 좋겠지만
관광지로서 잘 단장해 놓았다면 한탄할 일이라 할 것이다
영광군에서, 전러남도에서 관광객을 불러들이기 위한 사업으로
법성포 마라난타사를 만들었다고 듣다보니
불갑사의 중건불사도 반갑기만 한 것이 아닌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런지 모르겠다.
조감도에서 본 큰 가람의 주출입구로는 좁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좁은 문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금강,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금강의 의미,
번뇌를 불법으로 부수고 대자유를 얻는 불계로 들어가는 문인 금강문이다
부산의 봄꽃은 이미 지고 없지만 불갑사는 봄을 붙들고 있나보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같은 올 봄을 불갑사의 꽃을 보며 위안을 삼아 본다
잃어버린 봄을 여기에서 다시 찾은 것일까?
금강문을 지나 천왕문이 기다린다
계단을 올라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사천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법을 보호하는 사천왕의 눈길을 의식하면 지은 죄를 잠깐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사천왕의 눈을 부라리는 표정이 지은 죄를 다 내놓아라는듯 하다
그런데 그 앞에 불전함은 왜 있는 것일까?
돈을 내놓으면 죄도 사해질 것이라는...이제 이런 불교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완만한 산세라 불갑사가 앉은 자리도 넉넉한 평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남에 비해 호남지역 고찰들은 찾아들기가 참 편안하다
마음도 넉넉해진다
금강문을 지나 넉넉한 마당을 거쳐 막아서는 만세루를 돌아 대웅전 마당에 들어선다
우리 순례객들 이외에는 별로 절을 찾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적막함이 감돈다
관광객들이라도 많으면 좋을텐데...
템플스테이,
요즘 어지간한 절집에는 다 유치하는 프로그램이다
포교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하는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이길 바란다
대웅전 앞 마당의 코너로 보이는 장면들이 참 아름다운 절이다
정성들여 중수한 불갑사의 도량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나무 석가모니불...
불갑사 대웅전에는 불단이 서쪽에 놓여져 있어 동향을 향해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마라난타 스님이 들여온 불교가 정토신앙이라는 분위기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단이 이렇게 놓여 있는데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이 계시다는...
불갑사는 무량수전이 아니라 대웅전이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존불이며
우보처로 아미타불, 좌보처로 약사불을 모셨다
고찰의 분위기가 창연하다
스님을 모셔서 말씀을 여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백제불교였는데 말씀이 진행될 수록 알아듣기 힘든 법문으로 흐른다
불교는 왜 이렇게 어렵게 풀어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고개를 들어 불단 좌우의 기둥에 붙어있는 쥐를 쳐다본다
안수정등의 비유를 새겨본다
흰쥐와 검은쥐는 [불설비유경]의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다.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달리다가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을 발견했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 그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고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가 아직 성난 표정으로 우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칡덩굴에 매달려 있는데 우물을 덮고 있는 나무에서 꿀이 한방울씩 떨어지니
이 위기를 잊어 버리고 그 꿀을 받아먹느라 정신을 놓고 있다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나그네
그뿐만 아니라 우물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는데...
그 나그네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줄,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말한다.
오욕은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스님의 말씀이 끝나고 잠깐 정진의 시간을 가진 후 대웅전 밖으로 나왔다
세심정이라고 현판이 붙은 수각이 있다
백제 불교 초전지에 와서 부정적인 생각을 먹고 있는 마음을 씻는듯 물을 들이켰다
고루처럼 만든 범종각에 눈길이 간다
원래 고루에 사물을 설치하더라도 범종은 땅에 닿아 있어야 한다
지하중생을 제도하는 의미가 범종을 치는 것이기에...
잘 살펴보니 지하로 연결하는 구멍이 땅으로 연결되어 있다
참 잘 만들어진 범종각이다
새로 지은 이 전각은 어떤 용도로 쓰여질까?
불갑사에 와서 느낀 점은 불사를 정성을 들여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자가 귀한 지역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사격이 탄탄하게 다져간다는 분위기가 좋다
불갑사.
불법이 제일이라는 가르침이 여기서 다시 호남지역에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발원을 올려본다
영광 지역이 다시 불자들이 많아져서 관광객이 아닌 신심있는 사람들로 가득하길...
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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