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자의 에세이 고찰순례기 110327
고성 연화산 옥천사
-물은 명수인데 담는 그릇이 그에 닿지 못하니-
옥천사 홈페이지에 소개한 내용을 살펴본다
옥천(玉泉)으로 유명한 천년고찰 옥천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옥천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맑은 옥천이 샘솟고 있어 옥천사(玉泉寺)라는 절 이름을 얻게 되었다.
옥천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며 예부터 각종 병을 고치는 감로수(甘露水)로 유명하다.
물은 수평일 때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지만 이 옥천은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특징이 있다.
한국 100대 명수(名水) 중의 하나. 많은 사람들이 옥천 샘물을 마시기 위하여 옥천사를 찾고 있다.
옥천은 암수 2개의 샘이 있는데 연화산 산속 물무듬이에 수샘이 있고 옥천사의 옥샘은 암샘이라 한다.
대웅전 향 우측 팔상전 옆에 옥천수각(玉泉水閣)이 위치하고 있다.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전교 십찰>의 하나로서 반개연화 9봉(半開蓮華 九峰)이 감싸고 있는 도량이다.
조선시대의 호국사찰로서 그 역할이 컸는데 임진왜란(1592) 후 조정에서는 일단 유사시에 대비하여 바닷가 사찰에 승군을 양성했다.
옥천사는 이 충무공 전적지인 당항포와 12km거리에 있어 여수 흥국사 등과 더불어 승군사찰로 지목되었다.
옥천사의 넓은 앞마당은 승군들이 훈련하던 훈련장이며, 우천시는 자방루(滋芳樓)에 집결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승군은 동편, 서편 2파트로 나누어 동편장은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서편장은 판사(判事:무관직 종5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스님들이 지휘했다.
사찰의 누각은 대개 2층으로서 누각 밑을 통과하여 계단을 올라 마당에 이르도록 되어 있으나
옥천사의 경우, 많은 인원이 2층 누각에 오르면 도괴될 위험이 있으므로 자방루를 튼튼한 단층 건물로 건립했던 것이다.
오늘날 옥천사의 외부 모습은 흡사 성채를 방불케 하는데 이 또한 일단 유사시에 즉각 방어태세를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번창했던 통불교 사찰(通佛敎寺刹)로서 불교정화운동의 선구자 청담대종사가 출가한 절이며 나한도량, 참선도량으로 유명하다
고성 개천면에 있는 친구의 집을 방문한 걸음에 옥천사를 찾았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오래 전에 찾았을 때는 이렇게 큰 절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시대의 시간은 머릿 속에 남아있는 모든 기억을 옛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다른 고찰들도 그렇지만 옥천사도 불사가 한창이었다
원래의 절 모습의 원형은 이미 찾아보기 어렵게 많은 불사가 진행되어 있었다
지금 공사중인 건축물이 옥천사를 얼마나 좋은 모습으로 만들지 알 수 없다
조선시대 승병 훈련을 위한 연병장 역할을 하였다는 자리에 건물을 들어서고 있으니 이미 원형은 훼손이 된 셈이다
절은 죽어있는 유물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유기적인 건물이니 필요한 만큼 짓는 것을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원형은 보전하면서 조심스레 손을 대야 하는 것인데 얼마나 고심해서 진행하는 지는 알 수 없다
호국불교, 호국사찰이라는 말이 요즘은 과히 주목을 받는 용어는 아닌듯하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등의 큰 전란을 이겨내는데 다한 역할을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그 흔적을 이렇게 훼손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화엄 10대 사찰의 주출입구 치고는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력을 가졌던 종가보다 조촐한 모습인 것을 보면 조선시대 불교의 처지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각기 다른 돌쌓기를 보면 원형을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한다
본시 절의 출입구는 이렇게 좁아서 일단 마음을 움추리게 한다
넓은 곳에서 진입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게 하여 성역으로 들어가는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작은 문을 지나 출입을 막듯이 서 있는 기둥을 지난다
승병 지휘부 역할을 하였다는 자방루,
누각은 건재하나 훈련장은 비어두지 못하고 이 시대에 필요한 건축물로 채워지고 만다
비어있다는 것이 무조건 채우기 전의 상태가 아닐진데 우리는 무조건 꽉 채우려고만 하고 있지 않는지...
화엄전교 십찰이라는 큰 이름과는 다르게 조촐한 마당을 가져 마음을 편하게 한다
크다는 의미가 눈에 보이는 것의 대중으로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공간에서 느낀다
고찰이라는 이름이 붙은 절을 단장하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뜯고 새로 지어내는 꼴볼견을 보게 된다
운동장 같은 외부공간을 만들고 크기만 한 전각을 짓는다
불상도 크게 건축물도 크게...
그렇지만 그 결과물에는 성스럽다거나 아름답다는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조촐한 마당,
찾는 이는 버스로 오든 승용차로 오든 결국 한 사람 그 자신이 이 공간에 든다
내가 받아들이는 공간이 아니라 관광버스가 담길 공간을 만들고 마는 이 시대의 불사에 혀를 찰 수밖에...
마당의 크기는 대웅전의 규모에 의해서 보통 결정된다고 본다
대중이 많이 모여 살기 위해서 만든 절이라면 대웅전의 규모도 크게 만들고 마당도 넓게 조성했을 것이다
마당은 그냥 비어둔 공간이 아니라 행사가 언제든지 준비되는 야단법석의 자리이다
지금은 왜 넓은 마당이 필요한 것일까?
신도가 그만큼 늘어나고 그 빈 자리에서 준비되는 행사에 참여하는 대중들을 위한 것일까?
몇 십 대까지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관광객에 불과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절은 더 이상 성소가 아닐 것이다
마당을 내려다보는 꽤 높은 석축 위의 대웅전,
완만하지 않은 경사의 산지에 조성된 절이라서 마당을 만들고 나니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 틈새로 출입을 해야하는 통로가 생긴다
대웅전 오른편의 통로를 지나니 옥천사라는 이름의 연원인 玉泉이 있다
한국 100대 명수 중의 하나라고 하니 그 물맛은 보증을 하는 것이겠다
차를 마시는 사람이 이 명수를 길어갈 물통을 준비하지 못했으니 배에 양만큼 담아갈 밖에...
이 대단한 명수가 나오는 자리에 이런 플라스틱 바가지라니...
옥천에 싸구려 바가지라 이 절의 스님들의 정서를 안타까워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담는 그릇에 따라 맛이 다른 법인데 좀 더 격식을 부여할 수는 없었을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 집을 판단하는 것은 나무 한 그루를 돌보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정리되지 않은 절의 분위기에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부처님을 모시는 도량과 살림을 사는 집은 뭔가 달라야 할 것인데...
대웅전 뒤에 나한전이 있다
옥천사가 나한도량이라는 증표가 바로 이 전각을 보면 알 수 있다
통도사는 사리탑, 해인사는 장경각, 송광사는 국사전이 대웅전의 뒤에 자리한다
보통 그 절의 특징은 바로 대웅전 뒤의 전각이나 탑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규모가 크지 않지만 마당의 크기와 잘 조화되는 대웅전이 마음에 담긴다
이 공간이 있으므로 그나마 옥천사는 기억에 남는 절이 되리라
이 공간 밖에 조성되는 이 시대의 필요에 의한 불사는 좀 더 신중하게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비어 있다고 하여 무조건 채워 넣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려야 하리라
비워진 그대로 존재해야만 채워진 것도 그 의미를 다할 수 있다
불사라는 미명하에 거둬들이는 잿밥에 관심을 둔다면 우리 불교의 미래는 그만큼 어두워질 것이다
봄이면 어김없이 마른 가지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한철에 어울리는 꽃이 필 것이다
여름이면 무성한 잎이 그 자리를 채우고 가을이면 떨어질 마지막을 단품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가지만 남은 그 모습도 나무가 가진 한철의 모습인 것처럼 비어있음의 소중함을 다시 느낀다
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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