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이야기

30년 진기의 보이 노차 한 편을 다 마시고

무설자 2012. 10. 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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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차 이야기

30년 진기의 보이 노차 한 편을 다 마시고

 

 

 

 

다른 복은 제가 바라는만큼 타고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차복은 아주 특별합니다

보이차는 돈으로 구해서 마시는 차보다 인연이 닿아서 마시는 차가 한수 위인 경우가 많지요

 더구나 30년 정도 묵은 노차라면 더욱 내가 소장해서 마시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노차는 늘 특별한 자리에서 마시게 됩니다

인급 보이차나 그에 버금가는 진기의 차는 그런 차를 소장한 분을 찾아가야 마실 수 있지요

다연회 다회에서도 가끔 마시게 되는데 그 날은 대박이지요

 

제대로 잘 보관된 30년 이상 진기의 노차는 참 귀합니다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습창차가 아닌 소위 건창노차를 마시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보이차의 역사를 대충만 검색을 해봐도 홍콩이나 대만 상인들이 오늘의 보이차 세상을 열었기 때문이지요

 

마시기 위해 보관한 보이차와 팔기 위해 저장해 둔 보이차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떻게든 익힌 차를 만들어서 좋은 가격을 받고 팔고 싶은 것이 상인들의 당연한 입장이겠지요

지금 남아있는 노차들이 상인들의 차를 익히기 위한 작업(?)에서 자유로웠던 차가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탕색도, 우린 후의 엽저도 밝은 갈색으로 탱탱한 잎의 상태를 보여주는 그런 차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마셔본 거의 많은 전설의 노차들이 검붉은 탕색에 검고 딱딱한 엽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맛도 노차라는 이름을 가장한 다시는 마시고 싶지 않은 그런 차였습니다 

 

 

이 평범한 포장지에 싸여져 있던 거의 30년 가까운 진기의 노차 한 편,

이 차를 소장하게 되었던 그 때가 2009년 이었을 것입니다

숙차를 좋아하는 내가 그 차를 구입해서 마실리는 만무합니다

 

노차를 마시고 싶을 때 찾아뵙기만 하면 귀한 차를 양대로 마실 수 있는 저만의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그 차실의 주인장께서는 저에게만 특별히 차를 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주 찻자리를 만들어 주시지요

제가 쓰는 차 이야기를 좋아해 주셔서 이런 글을 자주 쓸 수 있도록 말씀으로 귀한 차로 격려를 하십니다

 

그 무렵 작은 교통사고로 생전 처음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병문안을 오시겠다며 어떤 차를 마시고 싶은지 제게 물었습니다

저는 맛있게 마셨던 이 차를 조금만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몇 번 우릴 양이면 된다고 말씀 드렸던 그 차가 한 편으로 제게 왔었지요

깜짝 놀라서 받을 수 없다며 사양을 했지만 차가 아니라 마음이시라며 큰 후의를 베푸셨습니다

그 차가 오늘로서 두어 번 우릴 양으로 남아 영구보존(?) 될 예정입니다

 

 

언젠가부터 집의 제 찻자리는 조촐해졌습니다

차판 대신에 차기정 장인의 옻칠 목다선(茶船)을 쓰니 탁자의 자리를 적게 차지합니다

다선의 중앙에 60cc 자사호를 놓고 숙우와 잔을 놓으면 차 우릴 준비 끝입니다

 

 

이 앙증맞은 수평호는 생차 전용으로 귀한 생 노차를 우릴 때 사용합니다

이보다 조금 더 큰 90cc 수평호는 숙노차 전용으로 씁니다

자사호의 두께가 얇아서 조금만 부주의해도 깨뜨릴 염려가 커서 아주 조심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다선을 쓰면 좀 안전하지요

귀한 차를 우리는 마음은 정성 그대로라야 하니까 수평호를 쓰면서 예민하게 차를 우립니다

나무는 역시 인간적입니다 ㅎㅎㅎ

 

 

차맛을 그대로 드러내는데는 공도배도 자기가 좋은데 탕색을 보기 위해서 유리 숙우를 씁니다

탕색은 먹음직스럽다는 표현 그대로 농한 갈색입니다

뻑뻑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잘 발효된 후발효차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제 차 싸부님께 하사받은 가끔 쓰는 잔에 차를 담았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 맛은 차 생활에서도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제가 선택하기 어려운 보이차의 진수를 이렇게 혼자 글을 쓰며 누려봅니다

 

차 한 잔의 행복,

꼭 귀하고 비싼 차가 아니라도 나누고 나누어 받으며 삶의 참의미를 느낍니다

귀한 차, 귀한 다구...제가 가지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니 이렇게 마시면서 느껴 보라며 나누어 주시는 넉넉함을 배웁니다 

 

 

 

선생님이 나누어 주신 귀한 차를 혼자 숨겨두고 마실 수 없어서 나누며 마시다보니 이제 이만큼 남았습니다

두어번 우릴 양이 될까요?

이제 이 차는 마시지 않고 잘 보관하며 선생님의 정을 간직할까 합니다

 

 

가족들과 밤마다 가지는 찻자리의 소박한 다구들입니다

전기포트에 스위치만 누르면 하루를 잘 보낸 귀한 시간이 마무리 됩니다

밤마다 저는 팽주가 되고 우리 가족들은 팽객이 되어 차 한 잔의 행복을 주고 받습니다  

 

 

밤마다 차를 우리는 그 자리에 일상의 행복이 묻어납니다

돈이 많아도, 명예가 높아도 같이 나눌 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욕심이란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다고 하지요

 

넘치기 전에 비워낸다면 작은 그릇이라도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무 큰 그릇이라 차지 않는다고, 작은 그릇이라 금방 넘친다고 애 태우고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누는 기쁨은 주는 입장도 받는 처지도 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하지요

 

차를 마신다는 것,

찻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아주 간단한 일인데도 의외로 행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스무 번을 우리고 차호에서 꺼낸 엽저입니다

갈색이 온전하게 잘 보관된 보이차임을 알게 해 줍니다

귀한 차를 선뜻 건네 주신 선생님께 이 한 편의 차가 많은 사람을 즐겁게 했다고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선생님의 이런 마음을 배워서 숙차로 차를 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맛있는 숙차 한 편과 표일배를 같이 전하면서 차 한 잔의 행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노차 생각이 간절해 지면 선생님을 찾아뵈어야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가을 밤에 차 이야기를 쓰면서 행복에 겹습니다

이 밤은 차향이 더욱 향기롭습니다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