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세상 이야기

크리스마스 선물

무설자 2010. 12. 2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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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엄마아빠를 위한 연말 선물이라며 준비한 째즈 연주회를 다녀왔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고 하는 말을 내 아이를 통해 실감한다면 좀 과한 딸 자랑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고명딸을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못해 자랑스럽다. 사회생활 초년생으로 아직 제가 쓰기도 바쁜 용돈을 쪼개 티켓 한 장 가격도 만만찮은데 부모를 위해 거금을 들여 선뜻 이 자리를 준비한 마음이 갸륵하기까지 했다.

 

  연주회 날짜를 하루 앞두고 아내가 몸 컨디션이 안 좋다며 둘만 다녀오라고 했다. 딸과 나는 음악 듣기를 즐기지만 아내는 그쪽으로는 별로 취미가 없는데다 집에서 먼 연주회장 나들이가 내키지 않은데 몸까지 편치 않아 그런 통보를 했던가보다. 나훈아나 남진 공연이었으면 모르지만 이름도 모르는 ‘나윤선’이라니 괜한 걸음일 것이라 지레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딸의 음악 취향은 적극적인 편이라 제가 좋아하는 공연이면 내가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인데도 그쪽으로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이번 공연 관람도 알고 보면 우리 부부를 위해 마련한다는 취지를 얹기는 했지만 사실은 제가 보고 싶은 공연에 우리를 초대한 것일 터였다. 속내가 그렇다보니 아내의 불참 통보에도 섭섭하다는 기색을 강하게 어필할 수만은 없어 ‘티켓이 얼마짜린데...’하는 정도로 표현하고 말았다. 나도 나윤선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공연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었다. 가족 나들이를 자주 만들지 못하는 편인 내 입장에서도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고 세계적인 뮤지션의 공연을 즐기면 우리 가족의 멋진 연말 이벤트가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내는 두 사람의 저의를 한방에 수포로 만들어 버렸다.

 

  “외투와 가방 자리까지 준비해서 공연을 즐기는 우리는 재벌이 안 부럽네?”

한 장 남은 티켓이 아까워 공연을 볼 사람을 찾아도 가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둘이서 세 자리를 차지하는 의미를 딸래미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같이 앉지 못한 아내에게 미안했었지만 오랜만에 딸과 함께하는 데이트도 부녀지간이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이 같아서 이런 호사를 누리는가 싶었다.

 

  현대 째즈 뮤지션으로서는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진 나윤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부산에 있는 그녀의 팬으로 객석은 만원이었다. 공연 시작시간이 되자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가 밝아졌다. 나윤선의 공연 파트너로 초대되었다는 핀란드의 유명한 째즈 피아니스트가 먼저 등장해서 오프닝 멘트와 함께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윤선이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환호와 함께 박수가 쏟아지자 그녀는 오래 만난 사람들처럼 친근한 인사를 건네는 노련한 프로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 늦은 사람들이 제 자리를 찾느라고 미안한 자세로 움직이자 나윤선은 천천히 앉으라며 그들을 배려하는 멘트를 던졌다. 무대와 객석이 나누어지지 않은 이 여유가 째즈 연주장이 가지는 백미가 아닐까? 한 좌석 씩 비어있는 자리를 채우는 지각생들은 아마도 아내처럼 억지 초대되어 마지못해 온 발걸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나윤선의 이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공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어지고 관중이 가수와 함께 어우러져갔다. 클래식 연주회에 가면 어느 때 박수를 쳐야하는지 눈치를 봐야하며 기침 소리마저 조심스러워 듣는 자리여서 긴장의 연속이기가 쉽다. 그런데 째즈 공연장은 얼마나 자유스러운지 객석에서 나는 기침 소리를 듣고 무대에서 감기 걱정하는 이야기까지 해주니 또 한 번 박수가 쏟아졌다.

 

  나윤선의 무대는 정해진 반주에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가수의 목소리로 내는 다양한 음성으로 아카펠라 같은 분위기로 노래 부르기도 하고 보지 못한 악기로 현대 째즈의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이라는 고정관념을 허무는 그녀의 무대는 자유로움과 편안함, 그리고 즐거운 환호와 탄성이 함께했다. 앵콜을 세 번이나 받아들이는 그녀의 여유는 멀리 찾아온 세계적인 뮤지션이 팬들에게 나누어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한참 공연에 열중하는데 우리 자리를 내놓으라는 불청객이 나타났다. 아내의 자리, 우리가 잠시 누리고 있는 그 여유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그는 관객 중의 가장 늦은 참석자였으리라. 일단 가방과 외투를 무릎 위로 옮기고 그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좌석표를 보여주니 그의 옆에 앉은 여자 분이 당황해하는 듯 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다가 일단 몇 곡 남지 않은 공연에 집중해야 했다.

 

  그와 자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계속하다가는 자리는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시간만큼의 공연은 놓치고 말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앉을 자리는 그녀의 왼쪽 옆자리였을 것이다. 그녀의 오른쪽 자리가 비어 있었다보니 왼쪽 열의 사람들이 잘못 앉은 것을 바르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왼쪽 끝자리는 비어있었을 것이다.

 

  앵콜곡이 세 곡이나 이어지며 공연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했던 우리 자리의 권리는 먼저 앉아 있었던 여자 분이 자신들의 자리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사과를 듣는 것으로 대신했다. 자리를 지킬 것이냐 공연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의 판단의 마무리였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두세 가지 일이 중복되었을 때 내려야 하는 판단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일에서는 성공을 하고서도 가정을 잃고 마는 사람, 돈만 많이 벌면 다른 것은 다 지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며 그 쪽만으로 쫓아가다 잃고 마는 소중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공연 내내 관중을 배려하며 모두가 하나 되는 자리를 만든 나윤선의 째즈 연주회는 관중이 세 번이 아니라 밤새 그녀의 노래를 들으려고 하는 아름다운 자리였다. 나는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을 무엇으로 삼아 집중했을까 생각해본다. (201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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