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을 두고 있다면 그만한 행복이 있을까?
옛날 같으면 장남이 딸 하나로 자식 농사를 끝냈다면 큰 일 날 일이었을 것이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장남이지만 딸 하나로 스물 다섯해를 보내며 살고 있다
누구나 제 자식 일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칭찬에 인색한 인물이라 주변에 자식 자랑을 그렇게 하지못해 늘 불만이었다
그런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아이가 늦게 철이 들어서 그런지 자랑꺼리가 점점 늘어간다
대학을 졸업한 녀석을 곁에 두려고 애를 썼지만 일년을 부모 곁에서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국 서울로 가버렸다
몇년만 살다가 다시 온다고 했지만 그게 쉬울까?
딸이지만 하나 있는 자식이라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늘 지극해서 멀리 사는 것이 우리도 마음이 쓰인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글을 보내서 상품으로 받았다면서 외식 상품권을 보내왔다
제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으면 될 것인데 부모 생각이 먼저인 녀석이 고맙다
외식을 즐겨하지 않는 아빠가 미덥지 않는지 아예 토요일 저녁으로 예약까지 했다고 전화를 했다
예약된 레스토랑은 부산의 원도심인 광복동에 있다.
아내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 되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옛날 미화당 백화점이라면 부산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었을 정도로 최고의 번화가였지만 이제는 옛 추억일 뿐이다
그 옛날 미화당백화점 뒷골목에 사십대 이후의 분들은 다 기억할 추억의 장소가 있다
바로 고갈비 골목이다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나는 두어 번 가 본 기억 밖에 없지만 아직 있을까해서 골목을 찾아 보았다
고등어를 반으로 갈라서 구이로 하는 것을 고갈비라고 한다
온 골목이 이 고갈비 굽는 냄새로 진동했는데 이제 딱 두집이 남아있었다
이 두 집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몇 년 동안 이 화덕에서 고갈비를 구웠을까?
고등어 기름으로 얼룩진 고갈비 골목의 증거일 것이다
에어컨도 없는 가게에 할머니가 오늘 저녁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두 집 마저 없어지고 나면 부산의 미화당백화점과 영원히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미화당백화점 뒷골목에서 인생을 논하던 젊은 날의 추억이라도 마음 속에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이 골목에서 고갈비로 쏘주를 같이 마시던 먼저 가 버린 친구를 떠올렸다
이제 아내와 만날 시간이 되어 딸이 예약해 둔 패밀리 레스토랑 앞으로 향했다.
옛날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듯이 원도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 열심이다
길을 바꾸고 건물을 바꾸고 크게 넓게 높게...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체인형 패밀리 레스토랑,
지역색도 고유한 그 무엇도 없는 보편성의 극치인 음식점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브랜드라면 세계가 하나의 맛이라고 하는 게 브랜드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이런 체인형 브랜드가 지역 상권의 특성을 없애고 있다
서면인지 남포동 광복동인지 해운대인지, 부산인지 서울인지 광주인지 번화가에 가면 어디든 똑같은 분위기이다
음식점도, 주점도, 옷이나 신발 가게는 물론이고 길 분위기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밖에서는 이런 회한에 잠시 젖었지만 일단 저녁은 맛있게 먹어야만 딸의 효도에 보답하는 길이니 식사모드로 마음을 바꾸었다
이전에도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역시 우리 나이 또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역시 나이를 먹으면 우리 음식에 입맛이 맞춰지는 것 같다.
밥값이 비싼만큼 와인도 네 중류를 갖추어서 무제한 공짜라고 메모가 되어 있었다
달콤한 맛에서 쌉쌀한 맛까지 종류 별로 설명이 되어있었는데 나는 역시 달콤한 맛으로...
딸 덕분에 와인까지 한 잔 놓고 일년을 한번 먹을까말까하는 양식을 맛있게 먹었다
새롭게 탈바꿈하는 부산의 원도심인 광복동, 젊은이들과 함께 한 공간에서 양식으로 저녁을 먹으며 자꾸 고갈비를 떠올렸다
우리의 젊은 시절의 메뉴들이 이 곳에서 사라져가고 이 지역과는 아무 상관없는 듯 바뀌어가고 있는 길이 생경스러웠다
나는 왜 이곳의 변화가 생경스럽고 무엇인가 지킬 것이 있다는 사명감이 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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