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이야기

옹기항아리와 보이차

무설자 2007. 6. 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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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차 이야기 210906

옹기항아리와 보이차

 

 사무실 내 방에는 옹기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다. 얼핏 보면 화장기 없이 햇볕에 그을려 나이를 알아보기 어려운 시골 아낙 같아 보인다. 아마도 살며시 품에 감기듯 안을 수 있는 허리 잘록한 아가씨 같다면 내 손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울퉁불퉁 순박한 모양새가 어디에 두어도 눈에 잘 띄지 않아서 부담 없어 보인다.

 

 오래 전 포교당 설계를 진행하면서 뜯어낼 집 베란다 한 쪽에 버려져 있었던 것을 사무실로 가져왔다. 사무실에 항아리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보이차를 마시는 내게는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옹기항아리는 어떻게 쓰이고 있을까?

 

 사무실의 내 방은 설계를 하는 작업공간이자 방문하는 손님을 맞는 접견실도 되고 차를 마시는 다실이기도 하다. 작업을 하면서 차를 마시지만 일 때문에 손님이 와도 차를 내고, 서 차를 마시면 접견있으면 차를 내기 때문이다. 물론 업무와 상관없이 일부러 차를 마시러 오는 분도 있으니 내 방은 다목적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마시는 차는 거의 보이차이다. 녹차를 마신지 20년이 지나서 보이차를 만나 첫 눈에 반해 순식간에 빠져든 연인처럼 가까이하고 산다. 어쩌면 이제는 연인 단계를 지나 한 집에 살고 있는 배우자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녹차를 마실 때는 몇 종류만 갖추면 되었지만 보이차는 마시는 세월만큼 가지 수가 자꾸 늘고 있다.

 

 보이차는 차의 특성으로 같은 브랜드라 하더라도 보관 연수에 따라 그 맛과 향이 달라지므로 소장하는 종류가 자꾸 늘게 되는 것이다. 보이차를 마시는 사람은 누구나 차를 즐기는 세월만큼 소장하는 양과 종류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 차모임에 함께 하는 다우茶友는 아직 미혼인데도 아파트에 혼자 사는데 빈 방은 차로 채우고 있다하니 놀랄 일이다.

 

 구입할 때 한두 편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곱 편 포장인 한 통 이상이므로 한 달에 몇 통씩이면 방을 금방 채워진다. 수석을 하는 분들이 초보 때 탐석을 나가서 한 배낭씩 지고 와 집을 온통 돌로 채우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이력이 쌓이면 그동안 모은 돌을 하나씩 집 밖에 내어 버린다고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보이차도 나중에 차를 알게 되면 모았던 차를 처분하는 과정을 밟게 된다.

보이차를 보관할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옹기항아리

 

 차가 일정량이 넘게 되면 보관하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예전에는 작업실에서 흡연을 했기에 차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밀폐용기에 넣어두면 차가 잘 익지 않기에 그 보관용기로 옹기항아리가 딱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옹기항아리를 구하려고 해도 요즘 항아리는 광명단을 쓰는 게 많다고 했다. 나이를 먹은 옹기항아리는 왠지 보이차와 딱 어울려 보였다.

 

 이 항아리에 무엇을 담았었는지 알 수 없는데 장이나 된장을 담아 냄새가 배 있다면 낭패다. 냄새가 남아 있으면 차를 보관할 때 배여들 것이니 차 보관 용기로 쓸 수 없다. 그런데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비와 바람도 맞고 햇볕에 건조되어 이미 냄새는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보니 이 항아리는 보이차를 보관할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좁은 사무실에 두기에 크기도 적당하고 모양이나 질감도 참 마음에 들었다. 보이차도 사실 귀족풍이기보다는 서민적이지요. 보이차는 항아리와 닮아 색깔이나 훼괴된 모습도 그러하고 맛이나 향도 순박하다.

 

 

 항아리를 내 방에 들여놓고 나니 그 안에 들어갈 보이차를 얻게 되었다. 마침 나에게 차를 가르치는 선배님이 오래 전 초보 시절에 구입했다가 한쪽에 미뤄놓은 숙차가 있다며 제법 많은 양을 주셨다. 선배님이 한지로 싸서 고이 보관했던 차를 항아리에 넣고 보니 쌀독에 양식을 가득 채운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졌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항아리에서 꺼낸 차를 우려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아직 보이차는 차를 모르는 이들은 신비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보이차라는 말만으로도 아주 귀하게 잔을 받는데 오랜 세월이 담겼다고 하면 황송하기까지 한 표정을 짓는다.

 

 일 때문에 사무실을 찾아오는 분들에게도 보이차에 대한 얘기를 먼저하고 일 이야기를 이어가면 대화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보이차에 대한 신비감을 느끼는 그 눈길은 제 일에도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보이차를 마시는 건축사라는 이미지가 제 작업을 한 격 더 높여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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