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삶, 상담과 답변

묶여있는 발목을 풀어야

무설자 2005. 9. 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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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저는 32년이란 세월을 살면서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산전수전 다 겪고 사는 사람입니다.

1남4녀(오빠가 5대독자), 딸 중에 장녀로 태어나 고생도 많이 했지요.

하지만 그때까지 한 고생은 나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흔히 한 고생이라 생각하고 별다르지 않게 살았지요.


오빠 때문에 전 부모님의 사랑이나 혜택은 전혀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 담해에 결혼까지 해버렸습니다.

그런 집이 너무 싫어서... 내가 있을 자리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 낳고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지만....


제가 궁금한 건, 정말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지만 전 꼭 알아야겠습니다.

제가 26살이었을 1999년 10월 저는 조카를 위하여 간이식수술을 했습니다.

수술을 하기 몇 달 전 어느 날 제가 꿈을 꾸었지요.

하얀 옷을 입은 선녀님이 귀저기 같은 긴 천을 잡고서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집에 누가 죽을 것이다"


저는 너무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분은 상냥하게 저를 보고 말씀하셨지만 그 모습이 저한테는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제가 애원을 했지요. 제가 무슨 일이던 할 테니 제발 살려 달라고요.

하지만 선녀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그 죽는 이가 누군지도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꿈에서 깨어 저는 벌벌 떨었습니다. 그냥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너무 생생했고 너무 너무 무서웠습니다.

처음엔 그 죽는 이가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술을 너무 과하게 드시는 날이 많았고 병원에도 여러 번 실려 가실 정도였으니까요.

병원에서 다시 한번 저 상태로 오시면 아마 돌아가실 꺼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꿈을 꾼 후 아버지는 술을 끊으시고 다시 예전처럼 건강하게 잘 지내셨지요.


그다음으로 제가 생각한 사람이 바로 제 둘째딸이었습니다.

항상 병약했고 너무 산만한 관계로 사고가 많았습니다.

천식이 있어 새벽이면 애를 들쳐 업고 밤을 새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병원에도 하루에 두세 번은 기본으로 갔었지요.

병원에서 사고 난 것만 해도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지요. 우리 현이가 살아있는 것이..

교통사고도 간발의 차이로 산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죠

잠시 한눈만 팔면 애가 없어지곤

했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제가 이렇게 제정신으로 사는 건 정말 기적이라고 봅니다.


이쯤해서 꿈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빠부부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지요. 태어난 지 백일이 조금 지나서 보통아이와 조금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병원을 전전했지만 병명은 알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제가 TV를 보다가 동산병원에서 세계에서 첨으로 병을 알아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지요.

담도폐쇄증이라는 증세를 요.

그때 당시는 이병이 거의 희귀병에 가까웠어요.

올케언니에게 조카를 데려가 보라고 했더니 제 짐작대로 조카의 병명은 그 무시무시한 담도폐쇄증이라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지요. 그 병은 이식수술만이  살 길이었으니까요.


간이식수술 지금은 자주 들어보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아주 어려운 수술이었어요.

조카가 B형이었고 오빠가 A형 올케가 B형이었지만 오빠와는 혈액형이 달랐고요.

올케는 이미 감염보균자라 올케의 간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 식구 중에 저와 바로 밑 여동생이 O형이었습니다.

간은 골수와는 달리 조직이 같지 않아도 혈액형이 틀려도 오형이므로 이식이 가능하다고했습니다.

우습게도 제가 꿈에서 말했던 것처럼 모든 상황이 제가 이식을 해야 될 상황으로 점점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언니 된 입장에 병약한 동생에게 수술을 시킬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저도 부모 된 입장에 오빠부부의 맘을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

저도 자식이 잇는데 자식을 살릴 수만 있다면 제가 대신 죽어도 아깝겠습니까?

하지만 간이식수술자체가 뇌수술다음으로 아주 위험한 수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남편 우리 딸들 시댁식구들.

제가 잘못되면 우리 친정 부모님조차 평생 죄책감과

저를 그리워하며 사시겠지요.


그러다가 ‘그래 나에게 선몽을 내려주신 거구나. 내가 나서야만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제가 수술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행이 남편도 허락해 주었고요.

처음 수술날짜가 잡혔습니다. 어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수술 후 어떻게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무작정 어떻게든 조카를 살리고자 하는 맘.... 우리엄마 아빠를 위해서...

오빠에게 늘 치이고만 살았던 저에겐 오빠부부보다 우리부모님을 위해서 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수술날짜가 정해지고 그날이 점점 다가왔습니다.

수술날짜가 되기 며칠 전 도저히 두려워서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미루자고 했습니다.

저도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이것저것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었으니까요.


날짜를 미루고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지는 조카를 보면서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날짜를 정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1999년 10월 6일...

22시간이라는 긴 시간 끝에 수술이 끝났습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아 나는 살았구나... 안도감.... 지금도 이 생각만하면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돌도 채 안 된 조카걱정보다 내가 살았다는 안도감....


조카의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말은 며칠 후에나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틀 후 일반병실에 입원하게 되었지요.

조카를 보고 싶었지만 제 몸 상태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충격도 너무 너무 컸었습니다. 복부절개만 60센티에 가까웠으니까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착찹 했었는지요...ㅎㅎㅎㅎ

하지만 우리 조카가 얼른 건강해져서 이 고모에게 안겨 웃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 엄청난 고통도 참았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다들 조카는 건강하다고만 잘 회복하고 있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조카를 남겨둔 채 퇴원을 하게 되었지요.

퇴원 전에 한번 보고 싶었지만 조카가 저로 인해 감염이 될 수 있다기에 얼른 건강해져서 만날 날을 기원하며 퇴원을 했지요.

몸은 아팠지만 맘은 가벼웠습니다... 얼른 만나야 될 텐데.


퇴원하고 삼일 째 되던 날.... 또 꿈을 꾸게 되었지요... 울 조카가 말을 했습니다.

돌도 안 된 애가...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춥고 너무 배고프다고요.

정말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모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겠다고...


꿈에서 깨어 엄마를 찾았습니다.

엄마가 저에게 말을 했지요. 조카 보러 가자고...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설마 설마 설마...

병원에 도착했을 때 오빠가 조카를 안고 나왔습니다.

생기 있는 얼굴이 아니라 조용히 잠을 자는 듯한 조카를요.


모습이 아직 잊혀지지도 않고 눈을 감으면 그 모습만 떠올라요.

얼마나 아팠으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얼마나 추웠으면... 그 어린것이.. 어른인 나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조카가 죽은 날이 10월 20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살아있던 날을 제삿날로 하지요.     

그때 비로소 살려만 주면 내가 어떤 일이든 하겠다고 한 사람이 울 조카가 아니라 울 딸 이었음을 요.

울 딸 생일이 10월 19일입니다.

내가 조금만 일찍 수술을 했더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조카가 살았다면 우리 딸은....


정말로 우스운 건 조카가 죽고 난 뒤부터 울 둘째딸이 너무 너무 건강해졌다는 겁니다.

정말 살 수 있을까 했던 우리 둘째 딸이 지금도 일년에 병원에 한두 번 밖에 가지 않는답니다.

한달에 이삼일정도만 병원에 안가도 의사선생님이 불안해서 우리 집에 전화까지 할 정도였는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더라도, 우습게도 난간에서 떨어졌었는데, 큰애가 재미나게 해준다고 휠체어에 올려놓고 그대로 밀어버렸어요.

제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휠체어를 잡을 수가 없었지요.

아 이제 정말 끝인가 보구나.

오늘 두 사람이 함께 가겠구나.

‘퍽’하는 딸아이의 머리가 벽에 박는 모습과 소리... 그리고 굴러 떨어지는 모습....


근데 울 딸아이는 머리에 혹만 낫습니다.

의사들이 놀라서 시티며 엑스레이며 안 해 본 게 없었지만... 딸아이는 혹 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의사들도 의아해 했지요.

조카가 우리 딸 대신 죽은 건 아닐까?


제가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 말이 아니라 글로 표현하자니 잘 표현할 수가 없지만...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때마다 조카생각이 났었어요.

저야 하루에 매일 생각 안 할 수가 없지만요... 수술자국 때문에..


팔공산에 한티재라는 산꼭대기가 있어요.

조카를 화장해 거기에 뿌렸다고 하더군요. 저는 움직일 수가 없는 터라 조카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지만요.

우리식구들은 아무도 뿌린 곳이 어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티재라고만 했을 뿐..


몸이 다 났고 찾아갔지요. 뿌린 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우유한통을 사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찾아가 뿌려주고 왔지요.

그리고 수시로 무의식적으로 찾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엄마가 함께 조카에게 가자고 했습니다.


근데 너무 놀랍게도 조카를 뿌린 곳이 제가 우유를 뿌린 곳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저는 조카에게 다녀왔습니다.

제 속이 풀리기 전에는 아마 조카에게 가는 발길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죄책감도 들고 우리 딸을 보면 뭐라고 해야 될 지...


담도폐쇄증은 한 아이에게서 발견되면 형제들도 걸리기 쉬운 병입니다.

만약에 다시 태어나는 조카가 그 병에 걸린다면 그때는 제가 꼭 살려주마라고 울 조카와 약속했습니다.

담엔 이렇게 보내지 않겠다고...


동생 꿈에 조카가 나타나 내 동생은 건강할 것이고 남자아이라고 말했답니다.

진짜로 그 후로 두 명의 조카를 낳았는데 둘 다 아들이고 둘 다 너무 너무 건강합니다.

울 엄마의 소원이 오빠 대에서 독자를 끊는 것 인데 소원풀이 하셨지요.


정말로 누군가를 붙잡고 속에 있는 말을 다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 클럽을 가입한 것도 이 모든 일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하는...제 인삿말도 의문을 풀기위해 가입했다고 했지만서도요...


조카죽고 우울증이 와서 미친 짓도 많이 했습니다.

그 어린것 혼자 보내기가 불쌍해서

따라 죽으려고 목도 매달아 봤고 술만 몰래 몰래 마시다 응급실에 실려 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죄책감이나... 울 딸 대신 죽었지 않나하는 생각들...


이 모든 일을 제 작은 소견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정말 괴롭습니다.

내가 살인자가 된 기분입니다.

글이 아니라 정말 말로서 속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이 나라가 아니라도 찾아뵙고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아무 뜻이 없던 내가 착각을 하는 것이던 그 어떤 것이든 풀고 싶습니다.

절에 가서 하루 종일 울다 온 적도,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조카에게 가서 울다 오는 것도 정말 이제는 너무 너무 힘이 듭니다.

풀어 주십시오.

 

 

 

무설자의 답

 
님의 글을 읽고 나니 참 맑고 착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하얀 백지 같아서 때가 탈까 두렵군요.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오시면서 불행을 피하기 위해 마음을 쓰시다가 행복이 다가오면 그 끝이 어디인가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원하지 않아도 지금 또 다른 결과들이 내 앞에 떨어집니다.

아차하면 죽을 수도 있는, 아니 아차해서 죽는 이들도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게 우리에게는 순간순간 냉정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님은 그 심판 앞에서 재판관에게 결과에 대한 원인을 알게 해달라고 조르고 있으시군요.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일들, 또 앞으로 생길 일들에 대해 우리는 걱정하고 때로는 두려워합니다.

생기는 일마다 기쁜 일이고 즐거운 일이라면 왜 그 일의 원인이 궁금해지겠습니까?

그러나 좋은 쪽의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이 생기는 것이 인생이다 보니 종교가 생겼고

점집이나 철학관도 종교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우리 주변에서 그 역할을 하고 있겠죠.

 

우리는 부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어찌하든 무사안녕을 빌고 무병장수를 빌고 부귀영화를 비랍니다.

무사안녕은 그저 나쁜 일없이 평안한 생활이 되게 해 달라는 것이요, 무병장수란 몸 아픈 데 없이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는 것이며

부귀영화는 이왕이면 돈 많이 벌어 호사스럽게 살게 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안 되잖습니까? 좋은 일만 늘 있는 집이 어디 있으며 아프지 않고 사는 이가 누가 있으며

남부럽지 않은 재물에 만족하며 사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통해서 사주팔자를 살피며 그 길을 찾고 묻나 봅니다.


 

나의 주인은 부모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내가 당하는 모든 결과는 오로지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입니다.

물론 공업共業이라는 것이 있어 더불어 만든 결과를 나누어 받는 것도 있지요.

지금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고통스런 삶을 사는 것도 이 땅에 사는 백성이기에 받아야 하는 공업이지요.

 

그러나 그 또한 나의 삶의 중심은 나입니다.

그 ‘나’라는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자신입니다.

때문에 그가, 그 누구 때문에 다른 누구가 어떠하다는 말도 성립될 수 있지만

지켜보는 이가 판단할 수 없는 그 결과의 주체가 되는 이의 몫이 항상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님께서 주변의 모든 상황에 대한 대변인이 되어 있군요.

물론 가족 한 분 한 분의 결과에 님이 개입되어 있지 않을 수는 없지만 님이 그 원인을 가장 많이 제공했다고 보실 수는 없습니다.

그 당사자의 삶에 님은 필요한 만큼만 개입되어 있을 뿐입니다.


 

전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결혼하여 시집살이를 아주 힘들게 한 여자가 몇 대 독자를 낳으면서 아주 대접받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무럭무럭 잘 자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렸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불행 끝, 행복 시작의 인생을 살아가던 그 여자는 죽은 아이를 안고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맵니다.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방황하다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당연히 부처님께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매달렸습니다. 부처님은 그 아이를 살릴 방도를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안에 가서 겨자씨를 얻어오면 네 아이를 살려주마.’

 

그 여자는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는 집집마다 다니며 물어봅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사람이 죽지 않은 집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십, 수백 집을 찾아다니던 그 여자는 태어난 이는 언제 죽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또 님처럼 전생을 알려고 하는 이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 너의 전생이 알고 싶다면 지금의 삶을 보면 되고 너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살펴보라.’

 

이미 지나간 과거가 만든 지금의 결과는 그냥 받아들이면 그 뿐이지 비록 과거를 알게 된다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 내가 한 일이 오늘 결과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내일의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왜 어제의 일에 묶여 내일의 삶을 제대로 만들어가지 못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까?

 

님이 친정을 벗어나 일찍 결혼을 한 것을 돌아보면 님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개척한 것 아닙니까? 

이제 부처님께 과거를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지 마십시오.

부처님은 과거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주인공이 되는 지금 잘 사는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과거가 알아진다 하더라도 지금의 삶이 내 미래를 열어간다고 볼 때 오히려 그 과거가 내 발목을 붙들어 맬 뿐입니다.

 

흰 종이처럼 깨끗한 님의 삶에 님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가는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님의 의지대로 만들어가는 삶의 모습에 기대를 담아 굳세게 살아가는 그 방법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배우시길 바랍니다.   

 

무설자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