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풀어 쓰는 건축이야기

갈림길에서 길을 묻다

무설자 2005. 8. 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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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인가? 큰 결정을 해야했었다.대학을 졸업하고 5년차에 막 접어들었을 때였다. 사무소를 옮겨야 하나? 아니면 있던 곳에서 적당히 개기다가 건축사 시험을 보아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있던 사무실에서 개기면 5년 차니까 시험 준비를 하다가 6년 차에 시험을 치면 되고, 사무실을 옮기면 새 환경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험 준비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건축사 자격증이 벼슬처럼 여기던 시절이었지만  그 욕심보다는 일에 더 목이 말랐다.

 

있던 사무실에서 일을 제대로 익히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1년 차를 보냈던 곳에 다시 가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마음처럼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학 선배님을 찾아 뵈었다. 2년 선배였지만 2년이라는 시간차를 떠나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다.

 

어쩌면 얘기를 듣기보다는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대부분 누구를 찾아갈 때는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자리를 찾는데 보통은 충고같은 얘기를 많이 해주기 마련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누구라도 찾아오면 그의 얘기를 잘 듣고 필요한 얘기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방통행으로 내 얘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는 내 얘기를 참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얘기했다.'건축사사무소는 월급을 받는 곳이기도 하지만 일을 배우는 곳이기도 하지요'

 

2년 선배인 그는 지금도 말을 놓아 하지 않지만 그 때도 그랬다.'월급을 받는 일은 아무데서나 가능하지만 일을 배우는 곳은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월급을 받으며 실무를 하는 건 아무 때나 가능하지만 일을 배우는 건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는 결정적인 얘기를 했다.' 건축사를 따는 순간 배우는 건 끝이 날 수 있습니다. 경력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건축사를 따버리면 배움도 같이 끝이 날 수도 있지요. 옮기려고 하는 사무실은 일을 배우기가 좋은 곳입니다.'그는 그 때 막 건축사를 취득했을 때이다.' 내가 건축사를 땄다고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자격증은 그렇게 바쁜 게 아닙니다. 저라면 옮기겠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는 사무실을 옮길 결심을 했고 며칠 뒤 있던 사무실에 사표를 냈고 옮긴 사무실에서 건축사를 취득하기까지 5년의 시간을 더 보냈다. 물론 동기들보다 4년의 시간을 더 지나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 4년의 시간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결정적인 과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수천 평에서 수만평의 규모를 다루었고, 몇 십명의 사무실에서 백 수십명의 조직으로 커가는 기간에 기획, 계획, 서울지사관리, 사보 편집장에서 건축전문지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때 건축사라는 길을 서굴러 선택했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여유는 지금보다 다소 나아질 수도 있었겠지만 좀 더 큰 그릇의 내가 만들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개업을 늦추다가 15년 차에 지금의 사무소를 내기는 했지만 희망의 계기는 분명 그 때 만들어졌을 것이다.

 

갈림길에 서 길을 선택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준 이, 아직 그와 소주 한 잔 나눈 적이 없으니 내가 아직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것이다. 분명 지금도 그와 얘기를 나눈다면 지금의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을 텐데...... (2005.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