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처마 예찬

무설자 2020. 11. 2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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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예찬

                                                                                                    김 정 관

 

올해는 절기로 입추가 지났는데도 장마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기억 창고 한쪽에서 통도사 극락암 선방 툇마루에 앉아 있는 나를 찾아냈다. 그 날은 예고도 없이 비가 쏟아졌다. 절에 머물던 사람들은 비를 피해 요사채 처마 아래로 모여 들었다. 나도 툇마루에 걸터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구름이 산허리를 두르고 절을 에워싼 대밭의 댓잎과 빗줄기가 부딪히는 소리만 산사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처마 바깥으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지만 축담 안쪽과 툇마루에는 비가 들이치지 않는 안전지대이다. 만약에 처마가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을까? 불당 안에 들어가 앉아서 참선을 할까 아니면 백팔 배를 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처마 아래 여유 공간이 불시의 사태를 거두어 준 셈이었다.

 

지붕이 기둥이나 벽에서 돌출되어 올려다보면 서까래가 보이는 부분을 처마라고 한다. 처마가 깊은 집은 이 미터 이상 빠져나오기도 한다. 이중으로 겹쳐진 서까래와 막새기와가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처마 선은 한옥의 백미이다. 앞이 툭 트인 한옥의 마루에 앉아 처마를 올려다보면 그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이 어떤 경치라도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기와지붕의 처마 선을 보면 중국은 곡선이 역동적力動的으로 과하게 치켜 올라가 있고, 일본은 선이 정적靜的으로 거의 직선에 가깝다. 우리나라의 한옥 지붕 처마 선은 가라앉지도 치솟지도 않은 부드러운 곡선이라 바라보기만 해도 편안해진다.

 

처마는 외관을 꾸미기 위한 의장 요소처럼 보이지만 집을 유지하려고 만든 기능의 산물이다. 고건축은 대부분 건축 재료가 나무와 흙이어서 처마가 비를 막아주지 않으면 집이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나무와 흙은 내구성에서 벽돌이나 돌에 비해 매우 취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에 지어져서 천년 가까이 버텨온 건축물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두 건축물이 그 장구한 세월동안 풍우를 감당하면서 지금도 불당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비결이 바로 처마에 있다.

 

나무기둥과 흙벽의 내구성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빗물이 닿지 않아야 한다. 목재가 항상 건조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하는 장치가 처마이다. 집의 구조체와 벽체의 취약한 재료의 성질을 보전한다는 기본 기능 이외에 처마 아래 공간이 가지는 숨어있는 역할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여름의 따가운 햇볕이 집 안에 들지 않으며 비 오는 날에도 비가 실내로 들치지 않아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빗소리를 듣는 운치를 즐길 수 있다.

 

집을 짓는 주재료가 철근콘크리트를 쓰게 되면서 처마는 더 이상 그 역할을 잃어버리게 되어 버렸다. 현대 건축물은 나무와 흙을 대신해서 철근콘크리트로 구조체를 삼고 타일이나 돌, 유리로 외부 마감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철근콘크리트 집은 비를 맞고 햇볕을 받아도 당장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처마를 두지 않게 되었다.

 

나무와 흙으로 지었던 한옥은 천년 세월을 안고 지금도 본연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데 철근콘크리트 집은 백년은커녕 오십년도 이겨내는데 힘들어 하고 있다. 외관이 풍우와 먼지에 더럽혀지는 건 물론 창틈으로 비가 새고 철근콘크리트 구조체에도 문제가 생겨 재건축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강도에 있어서 나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철근콘크리트 집이 왜 이 모양일까?

 

잔병치레를 하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골골백년이라는 말이 있다. 건강한 몸을 타고난 사람이 오히려 졸지에 얻은 병으로 손 쓸 틈도 없이 죽기도 한다. 잔병을 달고 사는 사람은 늘 제 몸을 챙기고 타고난 건강을 자부하는 사람은 몸을 돌보지 않아 낭패를 보는 경우가 건축물에도 해당되는 듯하다.

 

처마는 외벽을 보호하는 기능으로만 볼게 아니다. 처마 아래에 있는 외부도 내부도 아닌 모호한 공간의 여유가 더 매력적이다. 지붕에서 길게 나온 처마가 없다면 한옥의 주공간인 대청마루나 방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창호지문도 존재할 수가 없다. 처마 아래 공간이 있어 한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의 옛집은 내부가 벽이나 문과 창으로 막혀져 있다. 집 안은 바깥과 구분되어 내부는 내부, 외부는 외부로 완전하게 나누어서 쓰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한옥韓屋은 안팎이 뚜렷하게 나누어지지 않는 영역인 마루가 있어서 내외부를 하나의 공간으로 쓰고 있다. 비와 햇볕으로부터 처마가 보호해주는 마루는 방에서는 외부가 되지만 마당에서는 내부가 된다. 즉 처마는 집의 외벽을 보호하는 기능과 함께 내부와 외부의 영역을 완충시키는 공간의 여유를 확보한다.

 

아파트에서 처마의 역할과 작은 마당의 기능을 했던 게 발코니이다. 처마의 기능과 마당의 여유를 잃어버리게 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불법이었던 아파트 발코니 확장을 법으로 가능하도록 규정해 버린 일이다. 그 법령이 공포되던 그 날 이후, 공중에 떠 있는 집인 아파트에서 최소한의 외부 공간이었던 거실 앞 발코니는 선택의 여지없이 사라져버리게 되고 말았다.

 

아파트에서 발코니는 처마 아래 공간과 같아서 집 바깥으로부터 내부를 완충하는 주거생활을 지키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발코니는 화분에 심은 꽃을 즐기는 작은 정원이기도 하고, 빨래를 말리고 장을 담그는 마당의 역할이 되기도 한다. 비를 그어주고 여름햇볕을 가려주어 밖을 향해 문을 열어놓고 생활할 수 있는 처마 아래 여유 공간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보면 밤 열시가 넘었는데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 자꾸 늘고 있다. 휴일에도 바깥으로만 나도는 사람들에게 비 오는 날, 산사의 처마 아래 툇마루에 앉아 낙숫물을 바라보며 삶의 여유가 아파트에서도 누렸다는 걸 일깨워주고 싶다. 처마 역할을 하던 발코니가 사라져버린 상실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예고 없이 쏟아진 비를 만난 내게 우산을 건네주었던 누나도 기억에서 소환되었다. 그날도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 때문에 처량하게 젖은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길도 잘 모르던 시내에 나갔다가 광복동 어느 골목에서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상가의 처마 아래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칠까 한참 기다렸지만 비는 야속하게도 쏟아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을 찾아가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는 게 아닌가. 돌아보니 한 여자가 미소를 지닌 표정으로 비닐우산을 건넸다. 흠뻑 젖은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자기는 집이 이 근처이니 쓰고 가라며 처마 밑으로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를 바라볼 때면 문득 그 때 일이 떠오르며 그 누나가 내게 베푼 호의가 처마 아래 공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을 높이 짓다보니 처마가 사라진 지금, 사람도 여유 없이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다. 나를 돌보기에도 바빠서 주변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살다보니 극락암 선방 툇마루에 앉아 낙숫물을 바라보던 그 날 처마 아래 공간이 그리워진다.

 

-2020 에세이스트작가회의 연간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