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손주 얻으니 아들도 생기고

무설자 2020. 9. 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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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 손주가 예쁘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으랴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손주 얻으니 아들도 생기고

                                                                                       김 정 관

 

지난 유월 십일, 드디어 내가 할아버지가 된 역사적인 날이다. 우리 부부가 허니문베이비로 딸을 얻었던 그 때로 보자면 십년 정도 늦은 나이지만 친구들을 보니 거의 선두 그룹에 든 셈다. 딸이 아이를 가진 걸 알고 있는 선배들께 득손보고得孫報告 삼아 전화를 드렸는데 의외의 반응에 몸을 사리게 되었다.

 

요즘 세태에서 우리 때와는 많이 달라진 젊은이들의 결혼과 출산 풍토로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 전화를 받은 분들 중에 자식들로 인해 그런 걱정으로 지내고 있다면 내 전화가 부화를 돋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딴에는 예의를 갖춘다고 그랬지만 돌아오는 목소리의 느낌으로 마음을 달리 먹고 그 이후로는 전화도 가려서 드리게 되었다.

 

딸이 짝을 맺은 나이가 서른셋이었으나 아이를 가지는 걸 서두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막상 마음을 먹으니 임신이 쉽지 않았다. 걱정을 하던 중에 다행히 임신을 하자 얼마나 애를 태웠던지 엄마 배 안에 찰싹 붙어 있으라고 태명을 찹쌀이라 지었다고 했다.

 

아직 배가 덜 불렀을 땐 제 딴에는 친정엄마에게 효녀 노릇을 한다며 아기는 스스로 키우겠노라고 큰 소리를 쳤었다. 제 엄마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팔자를 타고나질 못해서 장손 남편을 만나 집안 일 뿐 아니라 바깥일까지 하는 걸 보면서 자랐던 탓일 게다. 환갑을 앞둔 나이로 몸이 성한 데가 없는 제 엄마에게 딸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딸이 신혼집을 구할 때부터 친정 가까이 사는 게 좋을 것이라 조언을 했는데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아기를 가지더니 제 딴에 벌써 엄마 노릇을 한다며 학군이 좋은 해운대로 집을 옮겨야겠다고 얘길 하기도 했다. 아내는 딸의 용기가 가상하다면서도 콧방귀를 날렸다. 역시나 딸은 애 엄마가 되더니 친정 근처로 집을 옮겨야겠다며 지금 사는 집을 내놓았단다.

 

딸은 산달이 가까워져 오자 육아용품을 친정에다 사재기를 시작하더니 곧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우리는 딸이 몸조리 하러 집에 오면 작은방을 쓰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자연분만을 하지 못한 탓에 침대를 써야 해서 안방을 내줘야 했다. 아기를 키우는데 무슨 육아용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온 집안을 점거해 버렸다. 우리 때는 모유를 먹여가며 면 기저귀 채워서 잘도 키웠건만 이런 야단법석이 따로 없다.

 

딸은 어떻게 하든 자연분만을 하겠다며 꼬박 하루를 산통을 이겨내며 애를 썼지만 결국 수술을 해서 출산하게 되었다. 철부지로만 보았던 딸이 엄마로서 의무를 다하려는 마음을 읽으니 가슴이 저려왔다. 딸이 엄마가 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찾아갈 수 없었다. 병원 뿐 아니라 산호조리원에도 가 볼 수 없어 출산 3주가 지나서 우리집에 오면서 손주를 보게 되었다. 손주를 맞이하기 위한 일차통과의례는 백일해 예방접종이었는데 사돈은 처음에는 무슨 예방접종까지 해야 하느냐며 버텼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손주를 언제 볼 수 있느냐며 목이 빠지는 중이라 한다.

 

드디어 우리 부부의 3세를 영접하는 날이 왔다. 퇴근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을 테니 일찍 들어갈 거라고 했더니 정말이냐고 딸이 되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지독한 몸살에도 결근을 하거나 조퇴를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성실과 근면으로 살아온 나를 아는 식구들이 반색을 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손주 보는 걸 어찌 미룰 수 있을까 보냐.

 

내가 딸을 얻었었던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아직 철부지였을 그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으니 자식 귀한 줄 얼마나 알았을까. 그 힘든 산통을 겪는 아내 곁을 지키기는커녕 출산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서 아이도 볼 줄 모르고 일터로 돌아왔었다. 그 때 아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면 여태 쫓겨나지 않고 사는 게 다행이지 싶다.

 

손주의 이름은 사돈이 지었다. 사돈이 명리학을 공부하셔서 며칠 간 고심해서 우리가 기다리던 이름이 나왔다. 그런데 그 이름이 예쁘지도 않고 중성적이라 처음 받은 느낌으로는 반갑지 않았지만 자꾸 불러보니 남녀평등의 세태에 잘 맞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집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 지 이제 한 주가 지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아기 울음소리와 자식 글 읽는 소리라고 했던가? 낮에는 잘 먹고 잘 노는 녀석이 밤이 되면 울어 젖혀서 온 식구들의 잠을 설치게 하지만 그래도 좋으니 할아버지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딸과 사위는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배가 고픈가?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가? 더워서 그러는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할머니 품에만 들어오면 언제 그랬냐며 울음을 그친다. 부모로서 초보인 아마추어와 아이를 길러서 키워낸 부모인 프로의 차이일 테지. 사실 할아버지인 나는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 손녀 이름만 불러대는 데 희한하게 울음을 그치기도 한다.

 

지금은 어차피 삼대가 한 집에서 살기는 어려운 세태이다. 그렇지만 조부모가 가까이 살면서 함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건 초보 부모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법이다. 조부모 또한 손주들과 시간을 함께 하며 노년을 보낼 수 있으면 이보다 더 한 축복이 있을까 싶다.

 

우리가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삼대三代가 한 집에 사는 가정은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제대로 가족이 완성되는 건 손주가 태어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때가 아닐까 싶다. 자식이 결혼을 하면서 한 집에는 며느리가, 다른 한 집에는 사위를 새 식구로 얻게 된다. 새 식구는 3세가 태어나면서 비로소 가족의 일원으로 일체감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 밖에 없는 우리집에 사위가 새 식구가 된지 3년이 되었지만 우리도, 사위도 만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손주를 우리집에 데리고 오면서 사위와 한 집에서 지낸지 겨우 일주일인데 삼년의 시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 사위가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이었다가 한 집에서 며칠 지내다보니 가족이라는 정으로 깊어지게 된 게 틀림없다.

 

백일까지는 손녀와 함께 사위도 우리집에서 지내게 될 것 같으니 그 시간이면 이제 한 가족으로 자리매김이 확실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사위가 백년손님이 아니라 자식이라고들 말하지만 한 공간에서 지내봐야 맘이 오가는 내 자식인지 판가름이 날 게다. 할아버지가 된지 4주차인데 벌써 손주 뿐 아니라 괜찮은 아들도 같이 얻게 되었다고 확신이 든다.

 

인생 후반부에 얻는 복이 이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

 

(에세이스트 93호-2020 7,8월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