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자의 에세이 茶人 이야기
그가 우린 짠 차가 그리워
세석평전 한재봉
그가 팽주를 하는 날은 감질나게 차를 마셔야 했다. 아무리 다우들이 많아도 유리숙우에 칠부 정도 채운 채로 차가 돌았다. 앞에서부터 차를 따르면서 오면 뒷자리까지 오지 못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그 다음 차례는 뒷자리부터 숙우를 돌려야 했다. 숙우에 꽉꽉 채워서 돌리자고 해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게 그의 스타일이니 어쩔 수 없이 반잔도 안 되게 부을 수밖에.
그는 늘 차를 짜게 우렸다. 그가 준비해오는 차는 노차이거나 극품 청차류였기에 차를 마시기 전부터 마음에 차향이 그득해졌다. 그의 서재에서 독대獨對해서 차를 마셔본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 마시는 정도만 있을 뿐 수장한 차가 많지 않았다. 그가 마시는 차는 그의 경제적인 여력으로 여유 있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이차는 30년 이상된 노차, 청차류는 대만 목책철관음이나 동방미인은 두등頭等급이어야 하며 무이암차류도 극품이어야 그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내는 차는 꿀꺽 마셔서는 안 되고 입안에 담아 굴려서 음미하면서 몸으로 흡수해야할 수준이었다.
다연회 다회를 10년 가까이 꾸려오면서 그가 준비해 오는 차는 늘 마지막에 마시는 대장차였다. 어쩔 수 없이 회장 소임을 맡아 다회를 운영해 오면서 가장 어려운 건 차를 준비하는 일이다. 그가 참석하면 한숨 놓지만 그렇지 않는 날은 다우들에게 송구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아껴 마시는 차를 가져오지만 여유분을 가져와서 멀리서 오는 다우나 차를 접한 지 오래되지 않은 다우에게 챙겨주는 것도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집에서 쓰는 차호 중에 엄지손가락만한 초미니 자사호가 있다. 차를 모르는 사람이 그 차호를 본다면 아기들의 소꿉놀이에 쓰는 장난감 그릇인 줄로 여길 것이다. 이 차호는 그가 귀한 노차를 마실 때 쓰는데 차를 넣고는 한 달을 우려 마실 때도 있다고 했다. 거의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빼고 또 빼어 마셨다고 했다. 얼마나 좋은 차이기에 그렇게 마실 수 있을까?
그에게 배운 보이차는 노차였지만 내가 마시는 건 숙차였다. 그는 귀하고 정해진 수준이상의 차를 추구했지만 나는 누구나 마실 수 있으며 어떤 자리에서 표일배로 우려서 나눠 마실 수 있는 차를 즐겼다. 그가 가끔 내 사무실에 찾아와서 차를 마실 때도 있었는데 꼭 차를 가져와서 맛이 괜찮으냐면서 물었다. 그는 숙차를 마시지 않았다. 숙차 중에서 오래된 차일지라도 숙미가 거북하다면서도 일어서기 전에는 한 잔 달라며 청해 마셨다. 한 날은 그가 보이차를 마시기시작할 때 사둔 것이라면서 숙차를 한 보따리 챙겨 주었다. 하관차가 많았는데 십년이 넘은 노숙차여서 숙차를 즐겨 마시는 나로서는 보물이었다. 보이차를 접한 초기였던 때라 별 생각 없이 양으로 다 마셔 버렸으니 차를 알게 된 지금으로서는 아깝기 그지없다.
다회에서 그가 얼마나 차를 아끼는지 모르는 다우들은 그가 내는 찔끔차(?)에 불평을 하곤 했지만 이제 그가 우려준 차를 그리워 할 것이다. 그가 없기에 다시는 마실 수 없는 차, 같은 차라 할지라도 그가 내는 그 차맛을 어디서 맛 볼 수 있을까? 이제 찻값이 너무 올라서 숙차를 마셔야겠다며 쓴웃음을 짓던 그, 그가 내는 노차가 그립기도 하지만 맛있는 숙차를 마실 때면 그가 생각난다. 숙차도 이제 숙미 없이 맛있게 만들어 나오는데. (2015.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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