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풀어 쓰는 건축이야기

길타령-광복로에서/계간 예술문화비평 2014년 가을호

무설자 2014. 9. 2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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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타령

 

김정관

건축사, 수필가/도반건축사사무소 대표

 

 

길이 없어서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김기택 시인의 시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를 읽으며 새보다 땅을 많이 밟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땅을 거의 밟지 않는 사람들은 주로 지상에서 몇 십 센티미터에서부터 수십 미터 높이에 떠서 사는 셈이다. 새보다도 땅을 다 많이 밟고 산다는 건 길 걷기를 좋아하고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 걸 이르는 것이렷다.

 

날개 없이도 그는 항상 하늘에 떠 있고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를 나설 때

잠시 땅을 밟을 기회가 있었으나

서너 걸음 밟기도 전에 자가용 문이 열리자

그는 고층에서 떨어진 공처럼 튀어 들어간다.

휠체어에 탄 사람처럼 그는 다리 대신 엉덩이로 다닌다.

발 대신 바퀴가 땅을 밟는다.

그의 몸무게는 고무타이어를 통해 땅으로 전달된다.

몸무게는 빠르게 구르다 먼지처럼 흩어진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가기 전에

잠시 땅을 밟을 시간이 있었으나

서너 걸음 떼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새처럼 날아들어 공중으로 솟구친다.

그는 온종일 현기증도 없이 20층의 하늘에 떠 있다.

전화와 이메일로 쉴 새 없이 지저귀느라

한 순간도 땅에 내려앉을 틈이 없다.

 

  - 시집 김기택『사무원/1999,창작과비평』 / 〈그는 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전문

 

 

김기택 시인의 이 시를 읽고 나면 정말 그렇다고 무릎을 칠 사람들이 의외로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도시는 걸을만한 길이 없어서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고 반문하면 할 말이 궁색할지도 모른다. 정말 걷고 싶은 마음이 이는 길이 드물다.

근래 우리나라 곳곳에 올렛길이니 둘레길이니 하는 무슨길이라고 이름을 붙인 걷고 싶은 길이 많이 만들어 지긴 했지만 그런 길은 관광지이기 십상이다. 결국 길이 없어서 승용차를 타고 다닐 수밖에 없다는 말에 동조할 수도 있는 게 이 시대 길의 슬픈 자화상이다.

 

 

곧은 길과 굽은 길

 

찻길만 해도 그렇다. 전국을 고속도로로 그물망처럼 이어서 고속도로만 연결해도 못 갈 곳이 없다할 정도로 차가 다니는 길로는 가히 세계적이라 할만하다. 남북으로 잇고 동서로 엮어서 전국 어디든 하룻길로 다녀올 수 있으니 멀어서 못 간다는 말은 빈말이 되어 버렸다. 이도 모자라서 굽이굽이 작은 마을을 거쳐 소도시를 잇는 국도마저 마을은 그냥 지나치고 소도시 단위로 직선화시켜 고속도로처럼 연결해 버렸다.

 

목적지만 바라보며 빨리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새로 난 길이 고마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굽이쳐 마을과 마을을 거쳐서 가던 길을 펴서 직선으로 내 버리니 길 주변의 마을들이 잊혀지고 말았다. 바쁜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바삐 가더라도 길을 따라 여유롭게 갈 수 있는 사람도 곧게 난 새 국도로 빨려들 듯 달려가고 만다.

 

길을 따라 가기만해도 만날 수 있는 굽이마다 자리한 마을도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로 입력하지 않으면 멀쩡히 존재하고 있지만 사라진 장소처럼 되어 버린 셈이다. KTX로 대표되는 빠른 길이 자꾸 생겨나면서 큰 도시로 작은 도시들의 경제권이 흡수되고 있다. 마을은 인근 소도시로, 소도시는 대도시로, 대도시는 다시 수도권으로 교육, 의료, 문화, 소비 등의 전방위 생활의 소비가 급속도로 쏠려 들어가고 있다. 빠른 길, 편한 길이 결국 큰 도시와 수도권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곧은길은 빨리 가기 위해 길이 주체가 되어 오로지 목적지에 닿는 기능만 가진다. 굽이굽이 굽어져서 이어지는 길은 길이 매개체가 되어 마을이, 산이, 들이 제 모습으로 드러난다. 길이 있어서 하나로 이어지던 우리네 삶이 곧게 낸 새길 때문에 낱개로 떨어져서 소외되어 버리고 말았다.

 

 

광복로에서

 

광복동, 남포동은 1990년대까지 부산을 대표하는 상권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부산시청이 연산동으로 이전하면서 서면에 그 패권을 넘겨줬었다. 하지만 옛 시청 자리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서고 광복로가 새로 정비되면서 지역 상권은 점차 과거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다. 새로 정비된 광복로는 부산에서는 보기 드문 걷고 싶은 길로서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차도를 일방통행으로 만들면서 인도폭이 더 넓게 조성되어 있어 차보다 사람이 우선인 길로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휴일이면 광복로 입구에서 옛 미화당 앞까지 일부 구간은 차 없는 길로 운영되면서 이 길을 걷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새로 정비된 광복로는 차로를 굽이치게 만들어서 차량의 운행 속도가 저절로 느려지게 되어있다. 굽어진 곳곳에 인도의 여유 공간이 생김으로서 쉴 수 있는 자리와 거리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스트릿 퍼니쳐로 볼거리가 있는 길이 되었다. 광복로와 이어지는 작은 길들도 저마다의 특성을 살리면서 광복로를 걷는 사람들을 끌어 들이고 있다.

 

‘좋은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길은 넓을수록 좋다’는 김수근 선생의 말처럼 광복로와 이어진 좁은 골목들이 걷고 싶은 좋은길이 되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셈이다. 그냥 넓기만 한 차도 위주의 나쁜길은 길과 이어지는 좁은 길마저도 생명력을 잃게 해버린다.

 

부산의 길들은 거의 나쁜 길이다. 새로 만드는 폭이 넓은 대로는 흐름이 빠른 강처럼 길이 가져야 하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 차를 위한 길을 만드는 만큼 사람이 걷고 싶은 길도 함께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어있는 길이 얼마나 있을까? 부산을 대표하는 도시인 해운대의 센텀구역만 해도 큰 건물들이 제 욕심을 차릴 뿐 길에 대한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광복로에 있는 와이즈파크빌딩은 이런 점에서 주목해 볼만 하다. 광복로에 면한 황금 같은 공간의 일부를 과감하게 길에 내 놓았다. 별도의 경계가 없이 길로 내 준 공간에 사람이 모인다.

 

길로 내놓은 광복로의 와이즈파크 빌딩의 공개공지

 

 

광복로 구간의 옛 미화당 앞에서 부평동 족발거리까지는 인도의 폭이 여유를 가질 수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와이즈파크의 공개공지가 그 숨통을 틔워주고 있는 셈이다. 그 덕분에 ‘좁아서 좋은길’이긴 하지만 여유롭지 못했던 광복로의 한계가 걷고 싶은 길로서 넉넉해졌다.

 

광복로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 첫 번째 답을 걷고 싶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걷고 싶은 사람들은 길을 바삐 걷지 않는다.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건 그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한다.

 

좋은길은 좁을수록 좋다면 좋은집도 작을수록 좋지 않을까? 광복로와 이어지는 좁은 골목에는 주제가 있는 작은 가게를 품고 있는 길이 많이 있다. 광복로가 살아나면서 이 일대의 골목길이 살아나고 골목마다 오랜 전통을 가진 가게들과 새로 생겨나는 가게들이 사람을 부르고 있다.

 

 

길 따라 걷고 싶은 도시를 그린다

 

부산을 대표하는 길로 갈맷길이 있다. 부산의 외곽을 따라 산 둘레, 바다 둘레, 강 둘레를 걷는 아름다운 길이다. 산과 바다, 강이 어우러진 삼포지향(三抱之鄕)의 도시 부산을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공을 들여 만든 길이라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최근 옛 하야리아 부대 자리의 부산시민공원과 송상현 광장 공원이 개장되었다. 타도시에 비해서 공원이 부족한 부산에서 16만 평이나 되는 도심공원과 서면과 시청을 잇는 중앙로를 끼고 대규모 공원이 조성되었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00만 명의 시민을 가진 대도시에 어울리는 공원으로서 부산이 내세울 수 있는 상징으로 꼭 필요하리라 본다.

 

하지만 갈맷길은 어느 때나 누구나 걸을 수 있는 일상적인 부산의 길이 아니며 시민공원이나 송상현 공장 공원도 부산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휴식공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겠다. 부산을 상징하는 공원, 부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길과 함께 부산을 일상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어쩌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겨울이 다가오면 가지를 맘대로 잘라내어 흉한 몰골이 되어 버리는 가로수, 지하철 시설물과 버스정류장 시설물이 차지해서 자꾸 좁아지는 인도, 걸어도 걸어도 잠깐 쉴 수 있을 여유공간이 없는 길이 대부분인 부산은 아직 삭막한 도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람이 걷고 싶은 길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하고, 길과 건축물이 어우러진 일상의 여유와 함께 하는 도시로 바뀐 부산을 그려본다.

 

 

-예술문화비평 2014년 가을호  예술시평/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