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풀어 쓰는 건축이야기

理判과 事判의 사이에 서서

무설자 2006. 9. 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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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건축사 작품-낙동강 하구 갈밭

 

겨울은 계절이 속도 조절하는 계절이다. 여름날, 뙤약볕이든 태풍이든 끝없이 내리던 장맛비든 서두르듯 양으로 내닫다가 찬바람 앞에서는 그 분위기가 가라앉고 만다. 그리고 겨울,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고 봄을 위해 휴식을 취한다. 사람도 겨울이면 한 해의 끝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운 날을 위해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진다.

 

예순을 넘은 내 나이는 겨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엇을 해도 끝을 보고 성과를 장담하던 그 열정의 시간이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던 체력도 이제는 하룻밤을 장담하기 어렵다. 친구들끼리 소주 한 잔 하는 자리에서도 건강 얘기가 빠지지 않으니 여름 같은 열정의 나이는 이미 지나 버렸다. 

 

나에게 겨울이란 어떤 의미인가?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지금 나는 무엇을 거둘 수 있을까? 이 즈음이면 한 여름 땀 흘려 곡식을 일군 농부는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수확의 기대를 즐기는데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참 열심히 살지 않았는가?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돈을 우선하지 않고 이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탐구하며 마치 수도승처럼 살았던 것 같다. 선방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수좌들처럼 건축이라는 명제를 부여잡고 제 깐에는 꽤 많은 공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한 건축으로 한 소식을 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노코멘트다. 하긴 선방에서도 깨달았다 말을 달면 그건 경계에 빠진 것이라 한단다. 깨달음이란 수학 문제처럼 답이 하나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깨달음이 없다거나 깨달은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인데 깨달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건축도 그런 것 같다. 이것이 건축이라고 쓴 책이나 훌륭한 건축가도 많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건축에 대한 답이나 그 답을 내리는 건축가를 만나지 못했다. 깨달음처럼 건축도 이것이라고 단말마처럼 얘기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수좌들이 선방을 전전하다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하면 정도를 벗어나 사도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선방에서는 답이 없다 판단해서 계율을 벗어나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 답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마 그 속에서 답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판理判에서 정해진 공안에서 얻어진 답도 삶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오답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사판事判에서도 찾았다는 답으로 삶과 하나 되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깨달음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건축의 답을 찾는 노력도 이판과 사판의 어느 쪽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선방 수좌처럼 고고하게 정진해 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념만은 그렇게 가지고 건축을 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와 이제 가을에 걸맞은 나이가 되고 보니 삶에 적용할 답안지를 차근차근 작성할 여유를 갖게 된 것일까?

 

작년 말에 오래 적에 일을 했던 건축주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실무 3년 차에 뵈었던 분이니 20 년도 더 된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설계를 했던 소아과 병원의 증축 관계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내가 건축사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나를 찾게 되었던 것일까? 그분의 말씀은 그때 나의 일하는 여러 가지가 참 마음에 흡족해서 이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잊지 않았다고 하신다. 나에게는 얼마나 귀한 만남인가? 100여 평이라 규모로는 작은 일이지만 땅과 설계비만 정해 주었을 뿐 모든 것을 위임받아 신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신뢰가 담긴 일을 얼마나 오랜만에 해 보는지. 

 

20여 년 전 그분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김 기사가 참 마음에 든다. 하지만 우리 나이가 그러니 10년 정도 지나서 편하게 지내면 참 좋겠다.”

왜 10년이 지나서 보자고 하셨는가? 그분은 나보다 대여섯 정도 많은 여자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곱절이나 지난 20 년이 넘어 만나게 되고 지금은 친 동기처럼 대해 주신다. 내게는 건축주와의 이런 만남이 참 많은 것 같다. 일 때문에 건축주로 만나게 되어 10년, 15년, 20년을 넘어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다.

  

겨울을 바라보는 지금 내가 거둘 소출을 생각해 보니 역시 그것은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지키는 것뿐이다. 건축사의 명성이나 작품도 아니요 그렇다고 경제적인 성취를 충분한 수확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만남을 끊이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시기를 딴마음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도 나를 믿고 아껴주는 분들 때문일 것이다. 만약 초심을 잊고 살아왔다면 이 분들은 지금 내 곁에 없을 것이다. 사판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 눈을 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역시 나는 이판에서 답을 찾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삶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사람들과의 따뜻한 만남 속에서 떳떳하게 건축을 말할 수 있는 정진을 계속할 것이다. 

 

지금도 사판에 휩쓸리지 않고 이판을 선택하여 정진하는 많은 건축사 동지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