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풀어 쓰는 건축이야기

2013년 부산국제건축문화제 시민건축대학 초청강연회 제3강, 세상에서 하나 뿐인 우리 집짓기

무설자 2013. 10. 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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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부산국제건축문화제

시민건축대학  초청강연 제3강, 강연원고

 

세상에서 하나 뿐인 ‘우리집’ 짓기

 

도반건축사사무소  김 정 관

 

 왜 집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짓는다’ 했을까?

-정성을 들여 만들어야 행복할 수 있는데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요소인 의식주인 옷과 밥, 집은 ‘만든다’라고 하지 않고 ‘짓는다’라고 쓴다. ‘짓다’라는 말을 어디에 쓰는지 사전에서 살펴보니 ‘사람의 의식주와 관련된 것을 재료를 들여 만든다.’라고 되어 있다. 하필이면 의식주와 관련된 것에 ‘짓는다’라고 쓰는 것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또 ‘글’을 짓고 ‘약’을 짓고 ‘농사’를 짓는 것이니 ‘짓다’를 붙이는 목적어는 생활의 근본이 되는 의식주와 함께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하는 일에 ‘짓다’를 붙여서 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의식주라고 표현하는 옷과 먹거리는 물론이고 집까지도 만들어서 파는 것을 돈을 주고 사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 삶은 지어서 살던 시절보다 행복이라는 의미에서 자꾸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옷과 집은 혼자 해결할 수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밥마저도 손수 지어서 먹기보다 만들어져 있는 것을 사먹고 있으니 이제는 ‘짓다’라는 용어의 쓰임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해야 할까?

 

  상품으로 만든 옷에 정성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며 공장에서 만들어서 나오는 패스트푸드나 식당에서 먹는 음식을 집에서 짓는 밥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몸이 아파서 짓는 약마저도 먹으면서도 불안해하고 있는 지경이니 지어서 해야 할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정성을 다해 지어서 해야 할 일을 돈만으로 손쉽게 구해 취함으로서 잃어버리는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손으로 한땀 한땀 지어서 만든 옷을 헤질 때까지 입었다. 입다가 닳으면 기워서 입었고, 언니가 입었던 옷을 동생이 물려가며 입는 것은 당연했다. 다 헤져서 입지 못할 지경이 되어 걸레로 쓰게 되면 옷의 마지막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입는 옷이기에 정성을 다해 지어야 했을 것이다.

 

  밥처럼 마음에 따뜻하게 가득 담기는 말이 또 있을까? 가장 정겹게 나누는 인사말이 ‘밥 먹었나?’라고 하는데 이견이 있을 수 있을까? 밥이 부족한 시절에는 정말 끼니를 해결했을까하는 필요에 의한 인사였을 것이었겠지만 요즘은 이 말보다 더 정감이 가는 인사가 없으니 쉬 쓰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인사말 속에 들어있는 밥은 지어서 먹는 밥이어야 하는데 하루에 한 끼라도 제대로 차린 밥상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침은 토스트 한 조각도 출근길에 서서 먹는데 저녁마저도 집에서 밥상을 차려줄 사람이 없어 외식으로 때우기 일쑤이니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광고 속의 멘트가 마음을 뒤흔든다. 엄마가, 아내가 지어서 차려주는 밥이 그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집은 어떤가? 아파트가 대세가 되어 버린 이 시대의 집 또한 만들어진 것을 사서 살고 있다. 천편일률의 대명사가 바로 아파트라는 집인데 여기에 사는 생활을 살펴보면 거의 방의 기능만 유지하는 집이 많을 것이다. 윈스턴 처칠은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이 사람을 만든다’라고 했는데 아파트는 어떤 사람을 만들고 있을까? 잠자는 공간으로서의 방의 기능만 살아있고 거실의 기능은 카페나 주점이, 주방의 기능은 식당이 대행하고 있으니 아파트라는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의미는 생각할 건덕지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지어서 사는 집은 지은이의 의도만큼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지만 만들어서 파는 집인 아파트는 잠을 자는 기능의 방만 쓰고 있는 셈이니 어떻게 우리가 바라는 사람이 만들어질까?

 

 옛집인 한옥을 ‘지은 집’의 모델로 살펴보니

-배치와 평면은 그 집의 얼이므로 개성 있게, 구조와 외관은 몸이므로 법식대로 짓는 집

 

  한옥을 얼핏 보면 외관은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마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한옥을 지으면서 공사를 하는 건 대목의 역할이지만 설계 과정의 주관자는 집주인이 된다. 집을 구상할 당시에 그 집안만의 복합적인 여건들이 반영되므로 집을 그렇게 만든 사연이 집마다 다르게 숨어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옥은 집마다 그렇게 지을 수밖에 없었던 프로그램을 건축주가 제시해서 배치와 평면을 만들게 된 것이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가 양립하면서 살아온 경주의 양동 마을에는 54호의 한옥이 있는데 그 중에서 관가정과 향단은 이 마을을 대표하는 두 성씨 종가집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집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상반되는데 관가정은 단출하면서 개방적인데 반해서 향단은 당시 아흔아홉 칸으로 지으면서 폐쇄적인 집이다.

 

  관가정의 주인은 조선 청백리 219명에 드는 손중돈인데 그의 명성에 걸맞게 숨길 것이 없이 한눈에 들어오는 집의 분위기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 집을 지었는지 알 수 있다. 관가정(觀稼亭)이라는 당호처럼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집으로서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향단은 손씨 문중의 관가정에 대응하고, 외척인 이씨 가문의 입지를 높이고자 이언적이 과시의 결과물로 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외관부터 화려하면서 과시적이다. 또한 내부평면은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가풍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한옥은 그 집안의 가풍과 건축주의 성향을 담아 지었으므로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집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의 영향에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의도하여 지은 집이라면 그 집이 만들어내는 사람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관가정의 사람들은 개방적이며 소박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향단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와 반대의 삶으로 아흔아홉 칸 집의 규모에 눌린 폐쇄적인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한옥은 집을 기획하는 집주인의 의지에 의해 집마다 다르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배치와 그에 따른 평면은 집 주인의 기획으로 그 집만의 독특함을 가지면서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외관과 집의 골격을 구성하는 구조는 대목의 주도아래 정해진 법식에 의해 만들어지게 된다. 배치와 평면이 사는 사람들의 삶이라면 구조는 집을 지탱하는 법식이며 외관을 구성하는 인자는 집을 드러내는 형식이면서 내외부 공간의 생활을 만족하게 하는 치밀한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 배치와 평면은 자유롭게 만들 수 있지만 구조와 외관은 정해진 질서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 한옥인 것이다. 옛집인 한옥은 분명 집이 사람을 만들어 왔다.

 

  한옥을 통해 이 시대의 단독주택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생각해 본다.

 

 이 시대의 집인 ‘만들어서 파는’ 아파트는?

-사람을 내쫓는 생기 없는 집

 

  아파트는 집을 만들어서 파는 회사가 표준형으로 만들어서 파는 상품이다.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의지가 집을 짓는데 관여되었을 리 없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지어서 살아야지’하는 가족이나 집주인의 의도가 바로 ‘집의 얼’이라고 볼 수 있음을 한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집을 짓고자하는 의도가 들어있지 않은 아파트는 ‘얼빠진 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이 흩어진 사람은 치매가 왔거나 바보일 것이고 얼이 빠진 사람은 식물인간이 되었거나 시체일 텐데 얼이 빠진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있는데 죽은 사람에게 없는 것이 생기라고 한다. 내 집, 우리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 얼이 없는 아파트에 생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다보니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생기를 점점 잃게 되지 않을까. 생기가 없는 집이라 그런지 정을 붙이기 어려운지 식구들이 일찍 귀가하지 않고 바깥을 떠도는 집이 많은지 늦은 시간에도 불 꺼진 아파트가 많다. 식구들도 집에 잘 있지 않는데 가족 이외의 사람들이 남의 아파트로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아파트는 주공간인 거실과 주방을 중심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다. 거실에서 식구들이 잘 어울리거나 식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는 일이 잦지 않으면 방문이 닫혀 버리게 된다. 닫힌 방문은 벽이 되어 버려서 가족 위주의 거실과 식탁은 역할을 잃어버리고 방의 기능만 살아있는 집이 되어 가족이 한 집에 산다고 하지만 방에 갖힌 개인만 있는 셈이다. 방만 쓰게 되는 집이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단위 세대 규모도 점점 작아지더니 이제는 아예 방 하나로 주택으로 삼는 원룸형 도시형생활주택이 대세처럼 되고 있다.

 

  원룸, 투룸이라고 지칭되는 도시형생활주택은 혼자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공간으로 만들어져서 마치 고독한 섬처럼 스스로 찾아들지 않으면 공간은 버려지고 만다. 어쩌면 방 하나로 구성되는 원룸 도시형생활주택이나 방만 쓰고 있다시피한 아파트가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 방만 쓰게 되어버린 이 시대의 주거문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게 된 원인이 아닐까?

 

  집에서 사는 분위기가 아닌 방 위주의 생활이 되면서 남의 집을 방문한다는 건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 가족 이외의 사람을 집에서 만난다는 것은 우리 식구와 손님의 유대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부분이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잃어버린 생활의 행태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부모가 아이들의 친구들을 알지 못하고 아이들이 부모의 지인들을 모르고 살게 되는데다 친척들마저도 자주 보지 못하고 사는 아이들이 살아갈 이 시대의 삶은 얼마나 외로운가?

 

  아파트는 섬이다.

 

 우리집, 어떻게 지어야 할까?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으로 짓는다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심한재 2019년 준공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우리집으로 지어서 살고 싶지만 그 소망을 현실화 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집을 짓고 나면 다시는 옮겨가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땅을 구하는 것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우리집으로 설계를 하는 것도, 예산에 맞춰 정성을 다해 하자 없는 공사를 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쉽게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 지어서 얻는 일이지 않은가?

 

  땅을 구하고, 설계대로 공사를 하는 건 객관적인 데이터로 정할 수 있지만 설계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한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땅의 결정과 공사라는 하드웨어는 정해진 법식대로 해야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우리집만의 특별한 의도가 담겨야 하기에 다른 집과는 차별화되는 설계를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게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이 바로 설계자인 건축사이다. 건축사는 건축주를 대신해서 가족들의 집에 대한 바람을 설계도면으로 표현해낸다. 건축사의 독창적인 작품이 곧 가족들을 위한 좋은 집은 아닐 것이다. 가족들이 살고 싶은 집에 대한 생각을 기반으로 삼고 그 다음에 건축사의 건축에 대한 철학과 집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설계가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단독 주택을 스무 채가 넘게 설계를 해오면서 오로지 나의 관심은 가족을 불러들이고 손님들이 찾아 드는 집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집이 가장 편한 곳이라야 일과가 마치자말자 집으로 달려올 것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편하게 있을 수 있어야 자주 오게 될 것이다. 첫 설계에서 지었던 집인 ‘관해헌’이 내가 의도했던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으로 만들어져서 그랬던지 그 집의 가족들은 이십년을 한 집에서 살았고 최근에 다시 나에게 설계를 의뢰해서 전원에 지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으로 지은 집에 입주했다.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은 어떤 집일까?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의 개념은 양동 마을의 관가정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한옥의 기본 얼개는 바깥주인의 공간인 사랑채와 안주인의 영역인 안채가 나눠져 있다. 사랑채에 손님이 늘 찾아와도 안채의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두 공간의 독립적인 영역 확보를 이 시대 주택에 적용시키면서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는 팁으로 찾아낸 것이다. 이 개념을 모티브로 개념을 정리한 첫 주택인 관해헌은 ‘매우만족’한 집이 되었다.

 

 거실과 주방식당이 한옥의 사랑채 영역이 되고, 방을 따로 한 동으로 분리시키니 가족의 어떤 손님이 와도 서로 지장을 주고받지 않는 집이 되었다. 부부의 손님이든 아이들의 친구든 집으로 불러서 만나는 것을 당연하게 되었다. 이 집의 가족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보니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십 년 만에 같은 건축주로부터 다시 짓는 집을 설계하게 되었다.

 

 -사람을 불러들이는 집,

  제가 제시하는 이 시대의 단독주택의 가장 큰 개념이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분리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거실과 방을 떨어뜨리는데 있다. 거실에서 방이 멀어지면 방문이 늘 열려있게 된다. 방문이 열리면 집은 큰 하나의 영역이 된다. 마치 한옥에서 방이 떨어져 있어도 글 읽는 소리가 온 집안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가족의 일상이 공유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처마가 긴 집, 

 처마가 있으면 내부와 외부가 자유롭게 소통 될 수 있다. 처마를 충분히 만들면 문과 창을 늘 열어 둘 수 있어 햇볕을 여름에는 가려주고 겨울에는 실내로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고 바람이 불면 시원한 공기가 실내로 받아들인다. 또 외벽이 비나 햇볕에 보호되므로 집의 유지관리나 에너지관리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풍부한 공간감과 수납공간이 여유로운 집,

 경사지붕의 사면공간은 거실에서 높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방 위에는 수납공간을 충분하게 만들 수 있게 해 준다. 내부공간은 풍부해지고 수납공간이 많아지니 우리집만의 여유로움이 편안한 생활을 가지게 한다.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이 이어지는 집,

 땅에 접해 사는 단독주택은 외부공간을 즐기는 특별한 재미가 있어야 한다. 큰 마당과 함께 주방과 이어지는 작업공간, 거실이나 식당과 하나로 엮어지는 작은 마당이나 욕실과 시각적으로 트여지는 공간 등으로 외부공간을 만든다.

 

  이렇게 한옥에서 이 시대의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는 수많은 모티브를 찾아낼 수 있어 아파트와 다른 하나 밖에 없는 우리집을 설계해 낼 수 있었다.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우리집을 지어서 사는 것을 소망으로 삼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혹시 이 소망을 잊고 있거나 잃어버렸다면 다시 찾아서 지녀야 할 것이다. 부부가 우리집에서 즐겁게 노후를 보내고 출가한 아이들이 자주 찾아주고 벗이 기꺼이 찾아들 수 있는 우리집이 있어야 삶은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우리집을 지을 수 있길 소망한다.

 

 

무설자(김정관)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들어서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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