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우리 집 지키기

무설자 2010. 5. 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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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여덟시, 대부분의 집에서는 가족들이 귀가하여 함께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어야 할 시간입니다. 퇴근 시간이 거의 이 시간이라 아파트에 도착하여 불 켜진 창을 한번 올려다봅니다. 그런데 절반이나 불이 켜져 있을까요? 아홉시, 열시가 넘어서 올려다보아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 꽤 되더군요. 밤이 깊은데 가족들은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요?

 

아빠는 회사 일로, 엄마는 모임으로, 아이들은 늦게까지 해야 하는 학원 공부로 늦는 것일까요? 이 시대 도시인의 삶은 가족들을 제각각의 생활로 흩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부부가 한 이부자리를 쓰고 살아도 서로를 잘 모르고, 아이들은 부모를, 부모들도 아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요. 왜 그럴까요?

 

각자 필요한 시간에 집을 나서고 귀가하는 시간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라면 그게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비밀번호로 문을 여는 현관문은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기다리는 사람 없다는 듯이 문을 따고 들어와 조용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아침밥을 걸러야 현대인이라면서 집을 나서니 식구가 한상에서 밥을 먹기 위해서는 날을 잡아야 하지요. 그렇기에 아파트에 살면서 여덟시 경에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은 너무나 행복한 집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2002년 한 해에 부산에서 분양광고를 낸 원룸 오피스텔이 일만 호가 넘는다고 합니다. 부산에는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것이 아직 보편화된 상황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이들을 위한 집인 원룸 오피스텔이 이처럼 많은 수요자를 찾고 있다면 이제 가족의 해체가 빠르게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긍정이나 부정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기보다는 서서히 정착되어가고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 사는 이들이 이렇게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직장 등의 헤어져서 살아야 하는 특별한 사유를 가진 분들은 이야기에 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전통적인 대가족 구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가족 단위가 망가지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제대로 유지해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이가 차면 가족을 구성하고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는 당연한 사실이 이제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만 가능하게끔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가장이 가족의 경제적인 면을 해결하면서 절대권위를 행사하던 옛날(?)에는 한 사람의 권위로서 통제(?)되었지만 부부가 함께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은 이러한 일방통행 식의 통제로는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가정유지의 기본 룰이 통제에서 자율로 빠르게 바뀌어져 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자율이 어떤 형식으로 적절하게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형식의 중심이 되는 테마가 적절하지 않으면 가족 구성원의 삶은 구심점을 잃고 방임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집이라는 의미가 가정-home이 아니라 그냥 건물-house가 되어버리면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잠을 자는 숙소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식탁에서 얘기를 나누며 같이 밥 먹고, 거실에서는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지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보낸 얘기를 나누는 것이 보통의 가정 분위기입니다. 오후 8시가 되었지만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은 이런 일상이 특별히 만들어야하는 이벤트처럼 되고 있는 것이지요. 자율체제에서 가정유지의 공통분모가 되어야 하는 ‘우리 집’이라는 테마가 실종되어 버렸거나 아직까지 정착키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시대는 강요나 일방통행 식의 요구는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지간도 이제는 서로 존중해야 하며 각자의 역할만큼 서로를 위해 애쓰는 부분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정이라는 의미가 살아난다고 봅니다. 부모이기에, 남편이기에, 맏이이기 때문에 위에 서고, 자식 아내 막내이기에 아래에 선다는 아래위라는 사고방식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수평선상에서 함께 하는 역할을 나누고 제 할 일을 책임감 있게 해 낼 때 공유의식이 커지게 되고 가정은 구심점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붓다가 제시한 공동체의 이상적인 형식인 ‘상가’에서 바로 이런 의미의 전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신격화된 모습으로 보여 지기 쉽지만 경전-특히 초기경전에서 보여주는 붓다의 위치는 수평적인 자리였습니다. 붓다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신의 일은 늘 스스로 앞장서서 하셨고 같이 행해야하는 일에서 제외되어 특별하게 대접받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인‘데바닷다’가 제일 높은 자리의 양위를 요구했을 때 내 놓을 수 있는 그 '높은 자리'는 이 곳-상가에는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을 굳이 성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가져가지 않더라도 불자들이 항상 읊는 귀의 삼보歸依三寶에서 이러한 공동체-상가에 대한 귀의라는 의미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한다면 내 가정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알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알더라도 그만큼 부지런히 실천해 간다면 붓다와 함께 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너져 가는 현대 도시의 가정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상가’의 의미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유교적인 가부장적 의식을 붓다의 가르침을 통한 상가의 구성 의식으로 전환한다면 가족이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높은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의 자리는 있습니다. 기득권자의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리더가 가져야 될 책임은 있습니다. 올바른 책임의식을 가진 리더가 먼저 그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그를 따르는 이들도 기꺼이 자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힘써 행할 것입니다.

 

리더-가장이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가족이 충실하게 소임을 다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가장이 가족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한다면 그 가정 또한 제대로 유지될 수 없지요. 직장도 사회도 국가도 올바르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권위의식이 가득한 높은 사람 대신 존경받는 리더가 있어야 하며 그를 따르며 스스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가능해 질 것입니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불이 켜진 집에서 식구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 또한 행복합니다. 아침밥도 그러했지만 저녁밥상을 마주 하고 앉아서 하루를 보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우리 집이 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서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애쓰는 우리 가족들을 사랑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항상 배우고 실천하는 우리 가족들의 생활을 사랑합니다.

책임과 의무로서 만들어 가는 행복한 우리 집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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