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해바라기의 홀로 서기

무설자 2010. 6. 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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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20년이 넘게 살았던 집 마당에는 몇 그루 과일 나무와 화초들이 마당 둘레 구석진 곳까지 제 멋대로 자랐습니다. 아파트에서는 얻을 수없는 땅을 밟고 사는 재미를 누리게 해주는 재간둥이들이지요.

 

무화과나무, 대추나무, 감나무는 계절을 따라 과일이 열립니다. 늦은 봄부터 여름내 무화과를 매일이다시피 따서먹고 가을이 시작되면 대추를 따 먹지요. 흔히 대추는 말린 것만 먹는 것으로 알고 있겠지만 열매에 붉은색이 약간씩 묻어나기 시작하면 따 먹기 시작하는데 달고 상큼한 맛은 어떤 과일과도 비길 수 없는 맛이 있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감을 따서 단지에 넣는데 한 그루에서 두 접 가까이 나오지요. 옹기단지에 넣어두고 겨우내 홍시를 먹는 즐거움을 장만하는 재미를 누렸답니다.

 

그 나무 아래로 동백, 천리향, 백합, 나리꽃이 순서대로 피고 집니다. 맨드라미, 봉숭아는 한 번 씨를 뿌려서 꽃을 피우고 나면 씨를 받아서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흩어져 해가 바뀌면 마당에 지천으로 싹이 올라와 온통 붉은 색 꽃밭이 됩니다.

 

봄이 다 갈 무렵이면 해바라기가 싹을 냅니다. 그 중에 몇 포기가 콘크리트 바닥이 갈라진 사이로 쏘옥 싹을 내밀더니 쑥쑥 키를 올립니다. 콘크리트 틈사이라 물을 제대로 받아먹기도 어려울 텐데 거의 중대나무 굵기로 잘 자랍니다. 잎이 어찌나 넓은지 그 잎이 만드는 그늘 밑에서 고양이가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서 쉴 정도입니다. 해마다 불어온 태풍에도 아랑곳 않고 튼실하게 자라서 줄기의 꼭대기에 해를 닮은 꽃을 피웁니다.

 

우리 절 화단에도 해바라기를 심어 놓았습니다. 한데 이 녀석들은 태풍 앞에서 당당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 아예 드러누워 버리는 녀석이 태반입니다. 태풍이 가고 나면 누워있는 녀석들은 일으켜 세워 지지대를 붙여 줘야 합니다. 절 화단은 한의원에서 가져온 약 찌꺼기를 퇴비 삼아 주기 에 영양상태도 훨씬 좋은데 왜 이 녀석들은 바람 앞에 그렇게 주저앉고 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던 해바라기는 척박한 조건에서 수분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땅 밑으로 뿌리를 깊이 내려야 했기에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에서 자라는 녀석은 편하게 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영양분을 발밑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데다 수분도 마를만하면 물을 챙겨주는 좋은 주인 덕에 구태여 뿌리를 깊게 내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 '뿌리 얕은 나무'가 되어 좀 큰 바람에는 뿌리가 들려 쓰러질 수밖에요.

 

차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심근성에 속하는 나무입니다. 뿌리를 워낙 깊이 내리기 때문에 이식-옮겨심기가 불가능한 나무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딸을 시집보낼 때 차씨를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차나무처럼 시집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집 귀신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그 차나무도 요즘 수확을 많이 거두기 위해 관목으로 개량을 해서 밀식 재배를 합니다. 그러다보니 영양 공급을 위해 질소비료를 주다보니 뿌리가 깊이로 내리지 않고 옆으로 퍼지는 천근성으로 변해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영양을 구하기 위해 깊이 내려가야 땅 밑의 다양한 성분에서 약성이 나올 텐데 질소비료를 양분으로 삼는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가 제대로 된 차라고 볼 수 있을까요?

 

코스모스도 그렇습니다. 시골길을 가다보면 길을 따라 무리 지어 피어있는 모습은 가을을 대표하는 풍경입니다. 그 코스모스를 화단에 심어보면 너무 웃자라서 큰바람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넘어져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썩어버리고 마는 것을 봅니다. 코스모스를 정성 들여 키우면 오히려 꽃을 보는 재미를 보기 어렵지요. 코스모스는 그냥 들길에서 제멋대로 자라야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좋은 환경에서 웃자라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을 보면 큰바람 한 번에 그냥 넘어가는 해바라기를 보는 것 같아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식으로 늘 배가 차 있는데도 밥을 입에 넣어주듯 따라 다니며 제발 먹어달라며 사정하는 부모의 넘치는 애정이 아이들을 웃자라게 합니다. 공부만 잘 하면 그만이라며 몇 군데 학원을 전전하며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은 제 스스로 홀로 서기 공부는 어디서 할 수 있을까요?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길들여지는 아이들의 홀로 서기는 너무 힘들어 보입니다.

 

아이들의 간식이 혀끝에서 달콤하게 녹아들 뿐 뼈와 근육을 만드는 영양이 되지 못하듯 온갖 학원에서 배우는 얕은 지식들도 아이들의 홀로 서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목마름이나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조그만 어려움에도 제대로 견뎌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말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홀로 뿌리내려 척박한 삶의 환경에서 스스로 경쟁력을 만드는 뿌리 깊은 해바라기처럼 아이들이 홀로 설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왔으나 당신으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또한, 당신과 함께 있으나 당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은 줄 수 있으나 생각은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들의 몸을 가둘 수는 있으나 마음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미래의 집>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곳을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꿈속에서 조차도...

 

당신이 그들처럼 되고자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고자 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인생은 과거로 가는 것도 아니며,

어제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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