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비 오는 날 사무실에서 밤을 기다리며

무설자 2010. 3. 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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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것만 보일 뿐 먼 풍경은 온통 회색이다. 가까이 소리만 들릴 뿐 먼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멀리 있는 건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분위기라서 편안해질 수 있다. 시간으로도 공간으로도 멀리 있는 건 나와는 무관하다고 억지로 놓아버리며 나를 돌아본다.


비 오는 날이기에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며 애써 무심한 상태에 젖어본다. 들려도 들리지 않는다고 보여도 보이지 않는다고 억지마음을 먹어 버리는 것이다. 듣지 말고 보지도 않는 날이라고 할까? 그렇게 억지 혼자가 되는 날이다.


창 밖으로 바람이 보인다. 바람을 볼 수 있다는 건 열어 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껴서가 아니라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내게 오는 바람이고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은 내가 보는 바람이다.


창 밖에 나무같이 흔들리는 것이 없는 자리에서는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스스로 모습이 드러나지 않지만 나뭇가지를 통해서 크게 흔들어 큰 덩치를 보여주고 작은 모습은 보일듯 말듯 부드러운 모습을 살짜기 보여주기도 한다. 바람이 모습을 보여주는 날에 비가 온다.


비 맞은 아스팔트 도로는 그냥 새까맣다. 그 새까만 길로 차가 지나간다. 아스팔트 길위로 비가 내리고 채 흐르지 못해 고인 빗물을 차가 밟고 지나간다. 차가 지나며 빗물을 밟는 소리가 아프다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빗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고 빗물이 아프다고 지르는 비명소리만 시끄럽다. 도시의  빗소리는 감성의 문을 닫게 한다.

 

창문을 닫는다. 바깥소리를 차단하고 눈으로만 비를 바라보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뭇가지에 내리는 빗소리를 그려본다.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떠올린다. 대숲을 흔드는 바람과 어울려 소리 내는 그 빗소리를 생각한다. 작고 약한 잎들을 흔들며  비의 양과 바람이 모여 내는 소리를 상상하니 벌써 내 마음은 그려진 대밭으로 빨려들어 가는듯 하다.


통도사 극락암의 배경은 영취산 꼭대기의 바위 밑에 소나무 숲이 있고 그 아래로 대숲이 절에 닿아 있다. 오래 전에 그 숲에 내리는 비가 내는 소리에  흠뻑들었었다. 그 때 극락암 마루에 걸터앉아 대숲을 소리 내게 하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바람 없이 아래로 내려 쏟는 비가 대숲을 소리 내게 하는 것도 청정한 산의 고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창문을 여니 또 차가 지나가면서 빗물이 비명을 지른다. 이제 비는 보이지 않고 그냥 시끄러운 소음만 귀를 어지럽힌다. 곧 회색빛 하늘도 어둠에 감춰지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차바퀴에 밟히는 빗물의 비명소리만 더 크게 들릴 뿐이니 비가 오는 도시의 정취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들리는 소리, 비 오는 날도 도시는 소음으로 가득할 뿐이다. 그 소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기에 도시인은 감성의 문이 늘 닫혀있다. 창문을 닫는다고 해도 감성의 문이 제대로 열리기는 어렵지 않을까?


자연과 만나는 빗소리라야 감성의 문이 열린다. 차소리가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내리는 빗소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일으키게 한다. 자신을 잊고 싶다면 깊은 밤 숲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어보라.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 빗소리에 집중하다보면 텅 빈 마음에 가득차는 것이 느껴진다. 


새도 벌레도 비 오는 날은 소리를 죽인다. 부슬 부슬 가는 비가 내릴 때 산에 닿아 있는 우리 집에서 산새가 우는 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지만 도시 한가운데 사무실에서는 창을 닫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내일까지 이 비가 내린다고 한다. 내가 사는 집은 산자락에 면해 있어 빗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차 한 잔 우려 찻물 따르는 소리가 향기로울 오늘 밤을 기다린다.  (2010,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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