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샘터 이야기

무설자 2006. 8. 1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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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두 번 차를 다리는 물을 떠오는 샘이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큰 길 가에 있는 그 샘은 꼭지만 틀면 맑고 찬 물이 콸콸 쏟아집니다. 얼마나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 살고 있는지 주택에서 지하수를 파서 한 꼭지를 언제든 아무나 와서 물을 받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습니다.

 

물을 떠 갈 때마다 고마운 마음을 그 집안으로 던지고 오지만 주인은 알 수 없겠지요. 물을 길어갈 때마다 몇 사람이 그 샘 주변에 있으니 전기료만 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든 시간제한 없이 늘 물을 길을 수 있으니 참 고마운 일입니다.

 

상수도든 펌프로 퍼 올리는 물이든 편하게 물을 먹기 전에는 물이 나오는 곳을 찾아 우물을 파고 두레박을 내려서 길어 올렸습니다. 우물가가 마을 사람이 모이는 얘기를 나누는 장소가 되었고 많은 사연이 있는 장소였지요. 물을 길어 양동이에 담아 집까지 날라야했기에 자연히 우물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섞여지는 장소가 되는 곳은 참 소중한 공간입니다. 집집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들을 수 있어 그 집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일을 의논할 수 있었습니다. 아픈 이가 있는 집은 약방문을 얻을 수도 있고 부부싸움에서 마음 상한 것도 풀 수도 있었겠지요.

 

지금은 집집마다 수도꼭지에서 손만 대면 물이 나오니 공동우물 같은 건 필요도 없지요. 그래서 자연스레 만나는 자리도 없습니다. 굳게 닫힌 현관문 안의 소식을 함께 나눌 길도 없습니다.

 

그  샘에 가는 한 날은 비가 왔습니다. 그 때도 샘가에는 몇 사람이 있었고 순서를 기다리느라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분이 참 고마운 일이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샘 옆의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옆에 옷차림이 누추한 사람이 앉아있습니다.

우산을 받쳐 쓰고 있는데 몸은 비에 젖어 있었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있었는데 물을 긷던 한 분이 자기 우산을 그분께 드린 모양입니다. 그 우산을 받쳐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만 받아 사무실로 돌아와서 그 우산을 나누어준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우산의 값어치야 얼마 되지 않겠지만 나누는 마음의 크기는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근처에 살기에 우산 없이 갈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 분은 우산을 나누어주고는 집까지 비를 맞고 갔을 것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 또한 어렵사리 살아가는 지금 삶의 팍팍함에서 따뜻한 마음의 여유를 얻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요즘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하루를 보내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러다보면 주변을 살피며 산다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사실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운 것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내 귀에 들리는 말의 대부분이 ‘살기가 너무 힘든다’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남을 돕는다든지 이웃의 어려움을 살피다는 것은 너무 호사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담 밖으로 지하수 꼭지를 내어 옛날 공동우물가의 정경을 만들어 사람 사는 모습을 보게 한 담 안의 그 분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몸이 불편한 이에게 우산을 내 준 그 분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 고마움을 왜 제가 느꼈을까요?

 

호스피스 봉사나 노인병원의 목욕봉사를 하시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오랫동안 봉사를 하시는 분의 말씀은 그 봉사를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고 합니다. 주는 마음으로 봉사를 하면 오랜 시간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항상 받고 오기에 다른 이들이 보면 참 힘들어 보이는 일이지만 정작 봉사를 하는 이들은 삶을 배우고 인생을 느끼면서 행하는 수행이 된다고 합니다.

 

몸에 생긴 종기를 치료하면서 그 종기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치료를 한다고 하면 옳은 얘기일까요? 그 종기를 위해서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기를 그대로 두면 내가 아프기 때문이지요. 이 사회의 어려운 이를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것도 결국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수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십시일반 물질과 정성을 보태는 사람들을 보면 이러한 이치를 실천하는 많은 이들을 보게 됩니다. 정성을 보태는 이들도 현실을 살아가는데 큰 고통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보다 더한 고통을 보면서 그냥 있을 수 없는 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봉사자들이 구걸을 해서 생활하는 이의 집을 고쳐주기 위해서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집주인은 100원짜리 동전1000여개를 담은 비닐봉지를 건넸습니다. 의아해서 쳐다보는 이들에게 집주인은 이야기했습니다.

 

‘이 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약속한 게 있어요. 구걸하면서 1000원 짜리가 들어오면 생활비로 쓰고,500원짜리가 들어오면 자꾸만 시력을 잃어가는 딸아이 수술비로 저축하고, 그리고 100원짜리가 들어오면 나보다 더 어려운 노인분들을 위해 드리기로요. 좋은 데 써 주세요.’

 

나누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인가 봅니다. 아직도 물질적인 여유가 없어 나누는 데 인색한 나는 정말 가난한 사람입니다. 샘터에는 오늘도 따뜻한 정성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늘 기쁜 마을 2006, 7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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