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은근하게 차를 마시니

무설자 2006. 11. 2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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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신지 20년을 넘은 것 같다. 처음 차를 마셨을 때가 아마 결혼식 주례를 서셨던 원광스님을 뵈었을 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아마 차라고는 커피 밖에는 몰랐을 때 였을 것이다. 하긴 물 아니면 숭늉 정도가 마시는 것의 전부 였을 것이다.

 

그 때는 풀 냄새도 아닌 것이 무슨 맛이라 표현하기도 어려운데 약간의 다른 맛이 나는 정도 였을 것이다. 그 맛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그냥 스님이 주시는 것이니 묵묵히 마셨을 뿐이다. 스님이 마시는 분위기있는 차, 잘 모르는 그릇, 다기에 찻잎을 넣고 물을 부어서 작은 잔에 따라 주시는 그 분위기에 조심스럽게 마셨다.

 

그만 마셔도 된다는 표현도 않고 주시는대로 자꾸자꾸 마셨다. 그게 녹차였다. 하긴 그때는 녹차라고도 하지않았지 아마 그냥 차라고 마신 것이다. 무슨 이런 차를 마실까? 커피는 달콤하고 사이다도 달콤한데 이건 뭐 맹물도 아니고 구수한 숭늉도 아닌 정말 맛으로는 신통찮은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누가 선물로 준 하얀 다기 한점으로 차를 마시게 되었다. 내 분위기가 녹차를 마시게 보였나 보다. 하긴 생활의 반을 절에서 살다시피하는 사람이었으니 마침 설록차가 대중에게 녹차를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그 광고효과로 나도 차를 마시는 사람에 끼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광고가 바로 나같은 사람은 차를 마셔야 한다라는 이미지로 나를 다른 이에게 설득했을 것이다. 어떻든 다기 한 점이 생겼고 나도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사무실에도 집에도 다기와 차가 넘쳐나게 되었다.

 

내게 선물이 들어오면 10가지 중 서너가지는 차이거나 다기이다. 선물을 할 때는 그 사람을 이미지로 떠올리게 되는데 그 때 그렇게 생각이 들게 하는 모양이다. 어떻든 지금은 물보다 더 차를 많이 마시니 이제는 차와는 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사무실에서도 손님께 차를 커피나 티백 차가 아니라 다관을 써서 차를 내게 되니 아주 색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바쁜 업무 중에도 다관을 꺼내어 이 차는 어떻고 하며 차를 대접하니 바쁘지 않고 여유있어보이는  사람으로 인상을 주게된다. 그것도 중국차, 일본차에다 요즘은 허브차까지 등장하니 더 그럴 것이다. 이렇게 차로 시작하면 기본이 두 시간이다.

 

 

이렇게 녹차로 마시기 시작한 차가 지금은 중국차에 흠뻑 빠져 들게 되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차가 들어오면서  우롱차라는 차를 마시게 되고 철관음, 관음왕으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보이차에 매진 중이다. 그동안에는 주로 선물을 받는 경로를 통해 그냥 마시기만 했는데 이제는 좋은 차를 찾아 마시는 수준으로 돈을 쓰게 되었다.

 

차가 있으면 마시는 단계에서 찾아 마시는 상태로 오면 다소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소위 매니아가 된다는 것이다. 100g을 기준으로 몇 만원을 넘기지 않으면 차는 기본적인 음료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차 매니아가 되면 그 기준이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한계를 정하기 어려운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차값이 부담스러운 상황이 되면 요즘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는 차 생활에도 철학을 가져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좋은 차라고 해서 큰 돈을 들여 차를 찾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차를 마셔야 하느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차생활이란 무엇이냐? 돈만 많이 들이면 좋은 차를 찾기는 쉽겠지만 바람직한 차생활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싼 차가 좋은 차라는 접근이 아니라 차를 알고 마시면 돈을 많이 들이지않고도 만족한 차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건 차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여유롭게 하기 위해서라는 단서가 추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에다 초점을 맞추면 차 생활이 삶을 구속하게 된다. 삶을 좀 더 여유롭게 하기 위해서 마시는 차가 생활을 구속한다는 것은 차를 마시는 본질을 어긋나게 하는 것이다.

 

 

그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바람직한 차생활은 차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가 좋아서 마시기 위해 시작할 때는 아주 단순하게 접근 하지만 차 자체에 빠지게 되면 자꾸 돈이 들어가는 쪽으로 흘러가기 쉽다. 즉 돈을 들여 입에 맞는 차를 얻으려고 하게 되는 길이다.

 

그렇지만 그 길로 목적에 이르려고 하면 끊임없이 고급차만 탐하는 값싼 매니아가 되고 마는 것이다. 고급차가 그 혀끝의 맛을 일시적으로 해결해 줄 지 모르지만 차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만족함에 이를 수는 없게 된다. 결국 그 길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차생활을 도모하지 못하게 된다.

 

차를 마신다함은 차가 주는 진정한 의미를 알아가는 기쁨을 함께 하는 것이다. 차값에다 혀의 만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차가 가지는 그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차라도 차의 양과 물을 붓고 우리는 시간,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를 알아가고자 한다면 결코 값 비싼 차라야 만족함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차를 먼저 시작한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와닿는 것은 차를 진하게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차의 양을 많이 해서 우리게 되면 물이 차를 곱게 풀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혀가 제 역할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차는 그 색을 눈으로 보고 입에 와닿는시간을 천천히 함으로서 먼저 그릇과 탕색을 보며 즐길 일이다. 그다음에 혀끝에서 시작한 맛은 차를 목으로 넘길 때까지 부드럽게  입 안에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가 목을 넘어간 뒤에 다가오는 그 오묘한 차의 본성을 감지해야하는데 너무 진한 차는 이런 단계를 알게 하기에 급하다는 것이다.

 

혀가 먼저 맛 보려고 하는 성급함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차를 가능한 연하게 우릴 수 있도록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것부터 연습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차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연한 단계를 가장 낮출 수 있다면 그 때부터 진정한 차생활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물이 차로 변하는 최소한 양을 아는 것이야말로 차인의 급수를   매길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진한 차는 혀가 원하는 것이고 연한 차는 차를 바라는 모든 감각기관과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해보면 어떨까?

 

 

이렇게 은근하게 마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술맛도 그러하고 사람이 주는 맛도 그러하다고 느끼는 나의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진한 향기는 코를 마비시키고 자극적인 맛은 혀를 마비시키며 과한 표정이나 말은 마음을 닫게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지금 수준의 차생활을 그대로 드러내는 한마디이다. 물이 풀어내는 차의 양만큼 삶에 나를 드러냄을 아주 소박하게 하는 지혜를 차생활에서 배운다.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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