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연하장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무설자 2006. 1. 12.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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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2005년이라는 이름을 달았던 365일이 지나고 2006년이라는 새 이름표를 단 날도 벌써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름표를 뗀 날은 매일 매일이 그날이고 또 하루가 지나면 어제가 됩니다. 그날에다 연월일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 생명력을 지니는 특별한 날이 됩니다. 매일 이 특별한 날을 특별하게 보낼 수는 없겠지만 하루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무심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은 가져야 할 것이라 마음을 먹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지난 일년을 돌아보며 고마운 분들과 인연을 맺어온 분들께 연하장을 씁니다. 자주 만나는 분들께는 만나서 인사를 드리면 되지만 자주 뵙지 못하는 분들께는 이 연하장을 쓰면서 한 해 동안 소홀했음을 용서받는 자리로 삼습니다. 어쩌면 저 나름의 인연의 끈을 이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연하장을 쓰면서 그 분을 떠올립니다. 앞에 계시는 양 짧은 글귀지만 저의 부족함에 대한 용서를 빌고 제가 드릴 수 있는 축원을 담습니다. 저한테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시간이 됩니다. 연하장을 쓰는 이 며칠이야말로 제게는 일년 중에서 가장 특별한 날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저와 인연이 닿는 분들을 다 만나려고 한다면 일년 365일이 모자랄 것입니다. 전국에 있는 분들을 다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며칠의 수고를 통해 그 분들과의 만남이 어떤 자리에서 이루어지더라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이어집니다. 한 해의 소홀했음을 용서 받아지는 신통한 방법이지요.

 

올해도 봉투의 주소 이름도, 내용물에 아무개 배상이라는 이름마저도 활자로 찍힌 표정도 의미도 없는 연하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나마 몇 통은 손으로 쓴 정이 담긴 연하장이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 손으로 쓴 연하장은 읽고 그냥 버릴 수 없습니다. 일년은 간직하고 그 중 몇 장은 내지를 뜯어 따로 보관해 둡니다.

 

이렇게 제가 받고 싶은 마음으로 연하장을 써서 보냈습니다. 제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 제가 받고 싶은 연하장처럼 그렇게 전해졌으리라 믿습니다.


 

 

올해는 예전에는 없었던 특별한 연하장을 썼습니다. 서울에 한분, 부산에 한분입니다.

 

오래 전 서울 불교방송에 출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좋아하는 시를 그림을 넣어 서툴지만 붓으로 써서 진행자와 작가에게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작가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늘 마음에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작년 연말에 다람살라로 달라이라마님을 친견하기 위해 가는 자리에 마침 제가 다니는 절의 지현스님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대화 중에 제 얘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그 분이 달라이라마님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되어 그 책을 선물할 마음을 내게 되었고 주소 확인 차 제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까이에서 모시는 지현스님과 그분이 저를 대화 속에 올려 이야기하게 되다니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그분과 제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으니 한 장의 서툰 글씨지만 나눔은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소중한 책을 연말에 받았으며 그 분께 연하장을 썼습니다. 이 인연도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합니다. 어떤 나눔이라도 인연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소중한 깨달음이었습니다.     

 

또 한분은 제가 하는 건축설계 일을 통해 알게 된 분을 이십년 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일을 익히는 사회 초년생이었고 그 분은 제가 다니는 회사에 일을 의뢰한 분이었습니다. 그 일은 작은 병원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의 선친께서 큰 병으로 투병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정을 알고 제가 필요했지만 구할 수 없는 약을 구해주셨던 분입니다.

 

그 고마움을 매년 연하장으로 대신하였는데 그마저도 십여 년 전부터는 보내지 못하였는데 연락이 온 것입니다. 물론 일을 의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변에 수많은 건축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마움을 보답하기는커녕 연락마저 끊고 사는 저를 찾다니요. 그것도 제 연락처를 찾기 위해 물어 물어서 말입니다.

 

전화통화의 첫마디가 연락을 끊고 산다며 나무라십니다. 아마 제가 꾸준히 연하장이나마 보냈으면 저의 부족함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을 텐데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연하장의 소중함을 또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연하인사를 대부분 핸드폰 메시지나 자필로 이름마저 쓰지 않는 연하장으로 보내는 세태입니다. 이럴수록 연하인사를 정성을 들여 손으로 쓴 편지로 받을 수 있다면 그 의미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오래 오래 인연을 이어가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소홀히 한 인간관계를 용서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을 살짝 보여줄 수 있는 일년 중의 소중한 기회일 수도 있고  서먹서먹한 사람에게 마음을 열수도 있습니다. 글을 쓸 기회가 없는 요즘 일년에 한 번 연하장을 자필로 쓰는 연하장은 분명 단순히 새해인사 이상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손으로 쓴 글이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됩니다. 올해 연하장을 보내지 못했거나 받는 이가 마음을 전해 받지 못한 연하장을 보냈다면 따뜻한 정을 담은 편지 한 통을 보낼 생각은 없으신지요?  

 

늘 기쁜 마을 2006년 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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