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차관련정보 모음

무이암차, 녹차 청차 홍차의 뿌리를 찾아 / 맹번정, 박미애 저, 이른아침출판사

무설자 2019. 10. 3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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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암차, 녹차 청차 홍차의 뿌리를 찾아


-맹번정, 박미애 저

-이른아침출판사  

    

 


 

* 대홍포는 무이암차(武夷岩茶)의 일종으로, 모든 청차(우롱차, 혹은 반발효차) 중에서도 최고급 차로 '차왕(茶王)'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다. -p13

 

* 중국 10대 명차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차가 바로 무이암차다. 무이암차는 이름 그대로 중국 복건성 (福建省)에 위치한 무이산에서 채취한 차를 지칭한다. 그런데 무이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산 이름 뒤에 '바위 암()'자를 넣어 무이암차라고 부르는 것이다. 차의 품종이나 녹차, 흑차, 홍차와 같은 차의 종류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무이산 풍경구 70평방킬로미터 남짓 되는 정암차 구역(正岩茶 區域,,무이산 내에서도 가장 좋은 차가 생산되는 곳)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청차를 무이암차라고 칭하고 있다. -p15

 

* 무이차의 찻잎을 따서 곧바로 쪄낸 다음, 곱게 갈아서<> 걸쭉한 상태로 만든다<>. 이를 둥그런 틀에 집어넣고 직경 3~10센티미터 정도의 떡 모양으로 꽉 눌러서 형태를 갖춘 후 중아에 구머을 만들어 10여 개씩 꿰어 은근한 숯불에 잘 말려서 보관했다가, 필요한 때마다 조금씩 부숴 가루를 내어 사용했다. 이런 제장 방식 때문에 연고차(硏膏茶)라고 불렀다. -p18

 

* 중국근대수공업사자료(中國近代手工業史資料)의 기록에 의하면, 1859년 중국의 차 수출량은 총 5,041,600킬로그램으로, 그중에 복건성의 복주(福州)항에서 수출된 것만 2,117,910킬로그램에 달해 총 수출량의 42퍼센트를 차지하였고, 1878년에 이르면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되어 당시 복건성에서는 녹차 ,청차 홍차 등 차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수출이 무척 활성화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서양 상인들에게 들린 무이차의 일컫는 발음은 표준어 '우이(Wu-Yi)'가 아닌 중국 남부 지방의 바언인 '보히(Bo-Hee)'였다. 이를 두고 1762년 스웨덴 식물학자인 린네(C.V Linne)가 자신의 저서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에서 중국차를 대표하는 무이변종(武夷變種)이라는 의미로 '보헤아(BOHEA)'라고 표기하여 현재까지도 쓰이고 있다. -P23

 

* 무이산 봉우리들의 평균 높이는 해발 600미터가 조금 넘으며, 그중 제일 높은 곳이 729미터이다. 중국 명차들의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높이의 지역에서 생산된다. 이곳의 기후는 사계절이 비교적 뚜렷하고, 서리가 내리는 날이 적으며 연 평균 기온은 섭씨 18도 정도이다. 강우량은 1년에 약 2,000밀리미터 정도로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특히 정암차 구역에는 협곡 굽이굽이마다 안개구름이 자주 생기는데,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한 번 생기면 쉽게 흩어지지 않아 습도가 높은 상태로 오랫동안 유지되어 연평균 습도가 평균 80퍼센트에 달한다. 또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인만큼 산을 덮고 있는 흙의 양이 적어서,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하는 키 큰 나무가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대신 키 작은 관목들이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이런 환경 탓에 계수나무, 진달래, 창포, 난초 등이 많이 자생하고 있는 무이산 정암차 구역은 항상 그윽한 꽃향기가 끊이지 않아 이곳에서 자라는 찻잎에도 이들의 꽃내음이 묻어난다. -P25

 

* 세계 최초의 다서 다경을 지은 육우(陸羽)가 활동하던 시대는, 시인 이태백이 음풍농월하며 세상을 노닐고, 양귀비가 한껏 사치를 누릴 수 있었을 만큼 강성했던 당나라의 개원지치(開元之治) 시대가 막 끝나갈 무렵 이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 분위기가 차 문화의 꽃을 틔울 시기를 앞당긴 것이다. 다경에는 당시에 이미 무이암차가 복건성 건주(建州)에서 생산되고 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건주는 현재 중국의 건양, 건구, 무이산 일대를 말하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차들을 통틀어 건차(建茶), 또는 건계차(建溪茶)라고 부르기도 했다. -P31

 

* 당나라 후기에 이르자 제국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지방의 여러 정권들이 난립하게 되었는데, 결국 거대했던 제국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당신 민왕(閩王, 은 복건성의 약칭)은 차를 무척 좋아하여 무이산을 포함한 건안 지방의 좋은 차밭들을 모두 국유화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차는 오직 왕실에만 납품한다는 뜻으로 '공차(貢茶)'라는 이름을 붙여서 다른 곳의 차와 뚜렷이 차별화시켰다. '공차'라는 명칭은 후에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에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P32

 

* 당시 건차는 오늘날의 녹차 형태였으며, 이때의 제다 과정은 증청(烝靑) 방법만이 사용되었다. 차를 찌는 증청 과정을 거친 후에는, 틀에 넣어 얇고 둥그런 떡 모양의 형태로 만들어 약한 불에 쬐어서 잘 말린 후 황실에 납품했다. 둥근 모양을 갖춘 차의 표면에는 궁중에 납품한다는 표시로 용과 봉황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때문에 '龍鳳團茶'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용봉단차의 제조에는 많은 노력과 기술을 필요로 했는데, 이를 개발한 이들은 당시 복건성의 지방 관리로 있던 정위(丁謂)와 채양(蔡襄)이다. 특히 채양은 소동파와 필적할 만한 대 문장가인데, 그는 자신의 저서 다록(茶錄에서 차의 생산과 제다법 및 보관, 평가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p34

 

* 무이산에서 생산된 차는 곧바로 원나라 황실에 바쳐졌는데 , 이것이 바로 1279년에 쿠빌라이에게 바쳐진 '석유(石乳)'라고 불리던 용봉단차였던 것이다. 일찍이 송나라 태종 황제가 즐겼다던 바로 그 석유를 맛본 쿠빌라이는 무척 기뻐하여 고흥에게 큰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안하 고흥의 아들 고구(高久)가 복건성 지방 관리로 파견되자 이들 고흥, 고구 부자는 무이산 구곡계 제4곡에 황실 전용 다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어다원(御䯬圓)'이라고 명명한 후 본격적으로 차나무 재배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미 멸망한 송나라의 북원차는 쇠락하기 시작했고, 바야흐로 진전한 무이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p37

 

* 명나라가 들어서면서부터는 무이차의 인기가 쇠락하게 된다.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원나라 몽골족이 물려준 모든 사회적 문화적 유산들을 부정했다. 따라서 무이차의 위상도 그와 함께 몰락하게 되었다. -p40

 

*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이산의 차농들은 제조가 금지된 용봉단차 대신 새로운 차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그들은 다시금 차밭을 일구며 무이차를 생산했지만, 제다는 예전의 방법이 아닌 인근 안휘성(安徽省)의 덖음차 제다법인 송라제법(松蘿製法)을 새롭게 도입했다. 이를 통해 무이차가 산차의 형태로 출시되는 현재의 제품과 거의 똑같아진 것이다. 바로 이 사건이 후에 무이차가 녹차의 형태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청차나 홍차와 같은 발효차로도 변신할 수 있는 기술적인 토대가 되었다. -p42

 

* 무이암산의 청차를 다른 지방의 청차, 즉 복건성 남부의 안계 지방의 철관음(鐵觀音), 광동 지방의 봉황단총(鳳凰單叢), 또는 무이산 인근의 반암차(半岩茶)나 주차(洲茶) 등과 구별하기 위해서 무이산 정암차 지역에서 생산되는 청차만을 '무이암차'라고 불렀으며, 또한 그 맛이 무척 진하다 하여 이를 '엄차'라고도 불렀다. 청대의 무이산 차농들을 청차의 제조 과정을 터득한 후 곧바로 홍차 제조 기술까지 습득했는데, 이때부터 무이산에서는 녹차, 청차, 홍차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무이산의 성촌향(星村鄕), 동목촌(桐木村) 일대에서 개발된 홍차가 바로 세계 홍차의 원조가 되는 '공부홍차(工夫紅茶)''소종홍차(小種紅茶)'이다. -p43

 

* 영국 정부는 독자적으로 차를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1834년경부터 식민지 인도의 동인도공사에서 대규모의 다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그러다 마침내 '아삼종' 차나무를 발견하게 되어 차 생산의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1839, 동인도공사에서는 현지에서 자생하는 아삼종 차나무를 무이산 차나무와 똑같은 방법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찻잎을 수확했다. 뒤이어 대량생산에 성공한 영국정부는 중국으로부터의 홍차 수입량을 빠른 속도로 줄여나갔는데, 때문에 중국의 홍차 가격은 큰 폭으로 떨어졌고 무이산의 차농들도 상당히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귀족들은 중국의 무이홍차 맛을 잊지 못해 많은 영국 상인들이 북건성을 찾아가서 고급 홍차를 직접 구입했다고 한다. -p46

 

* 무이산 절벽에 새겨진 '만감후(晩甘候)‘, 당나라 시인 손초는 나이가 들었어도 고매함을 잃지 않는 귀족이라는 뜻의 만감후라는 이름으로 무이암차를 지칭하여 그 위상을 보여 주었다. -p50

 

*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에는 모든 불교 행사에 차를 썼을 뿐만 아니라 불탑이나 승탑에도 봉안품(奉安品)으로 최고급의 차를 넣었음을 알 수 있다.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15세에 출가하여, 전국 각지의 명산을 두루 다니며 많은 저서를 남긴 걸출한 문인이기도 하다. 중국에 다경을 지은 다성(茶聖) 육우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그와 비견할 만한 인물로 초의선사를 꼽을 수 있다. 그의 저서 다신전동다송(東茶頌)은 지금까지도 한구 차의 경전이 되는 저술로, 그에게 '우리나라의 다성'이라는 호칭을 붙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P71

 

* 유교적인 대표적 행사인 설날과 추석날의 낮 제사를 굳이 '차례(茶禮)'라고 부르는 것도 예부터 전승되어온 헌다(獻茶), 또는 진다(進茶)라고 불리는 조상에게 차를 바치는 의식이 기저에 있었기 때문이다. -P89

 

* 우리나라 불교와 무이차의 첫 인연은 고려 왕자 의천(義天)이 송나라로부터 천태하과 용봉단차를 들여왔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P92

 

* 불교와 차의 인연 중에 재미있는 일화로 '끽다거(喫茶去),'다선일미(茶禪一味)'를 들 수 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차 한 잔 마시고 가게''차와 선은 한맛이다'가 되지만, 그 뒤에 감추어진 깊은 뜻은 오랫동안 곱씹어 본 후에야 겨우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저도로 이는 모든 불자들에게 1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화두가 되어 왔다. -P100

 

* 유럽인들이 처음 차와 만나게 된 것은 명나라 말기인 1606년경(조선이 임진왜란 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할 무렵)에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서였고, 1618년경(1613, 허준의 ,<동의보감>이 간행됨)부터는 러시아 및 기타 유럽 지역으로도 차가 전해졌다. 이 무렵 영국이나 네덜란드인들의 차 마시는 모습은 그들이 차를 구입해 간 복건성과 광동성 사람들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아서 그들이 중국의 차 문화를 그대로 답습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이 음용한 차의 종류는 무이산의 녹차를 비롯한 덖음 녹차였고 홍차를 선호하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P113

 

* 17731116일 밤, 항의 집회에 모인 상인을 비롯한 군중들은 영국 배에 올라가 차 상자를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차 9,000킬로그램을 바다에 던지며 이렇게 큰소리로 외쳐 댔다. "오늘밤 보스턴 항에서 티 파티가 열린다. 이름 하여 영국의 왕 조지 3세의 티 파티다." 이 소동이 바로 '보스턴 차사건'이다. -P126

 

* 세상 모든 차의 처음 시작은 발효되지 않은 녹차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가 명나라에 이르러 일련의 찻잎 발효 기술이 개발되면서부터 무이산 차농들은 제조가 금지된 용봉단차를 뒤로하고 청차와 홍차 생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 후 청나라가 들어서고(1636, 조선 병자호란 무렵) 동서양의 해상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면서 바로 이들 무이산의 차들이 동서양의 무역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이때부터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에 중국 차 열풍이 불면서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이 가장 사랑했던 것이 바로 '보헤아(Bohea)', 즉 무이홍차였다. -p140

 

* 무이산에서 자라는 야생차의 품종 수를 헤아려보면 약 1,000가지에 달한다. 이렇게 수많은 품종 중에서 무성생식(無性生殖)을 하는 품종은 수선, 육계, 기란(奇蘭 ) 등을 꼽을 수 있고, 유성생식(有性生殖)을 하는 품종 군체(群體)는 속칭 채차(菜茶)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성품(性品)을 기종(奇種)이라고 부른다. 정암차 구역에서 생산되는 기종을 따로 '정암기종(正岩奇種)'이라고 하며, 정암기종 중에서도 특히 우수한 형질을 가진 차나무 한두 그루를 선택하여 단독으로 찻잎을 채집하여 따로 제다한 것을 '명총(名叢)'이라고 한다. 명총의 차나무들은 대부분 정암차 구역 안에서도 특별히 환경이 아름답고 풍경이 기이한 곳에 심어진 경우가 많은데, 그래야만 뛰어난 맛과 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명총이야말로 진정한 무이암차의 상징이며, 청차(우롱차)를 취급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최상의 품격으로 인정받아 왔다. 수백 가지 명총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것을 꼽자면 주저 없이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무이임차의 4대 명총- 대홍포(大紅袍) , 철라한(鐵羅漢), 백계관(白鷄冠), 수금귀(水金龜) 이다. -p148

 

* 무이암차의 암운(岩韻)이란 암차의 색, , , 이 세 가지를 종합한 것을 말하는데, 차를 마시는 사람이 마음가짐과 감각, 느낌을 통해 가슴속까지 전달된다. -p187

 

* 청나라의 건륭 황제는 암차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p195

 

就中武夷品最佳 바로 이 무이암차의 맛이 제일 좋구나

氣味淸和兼骨鯁 기와 맛이 맑고 조화로우며 맛의 깊이가 잘 고아낸 뼛국물 같구나

 

* 명나라, 청나라 시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차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공식적인 행사나 사적인 모임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청나라 때는 부유한 복건성과 광동성 사람들도 차를 '차미(茶米)'라고 부르며 차와 쌀을 똑같은 비중으로 생각할 정도로 차 문화를 중요시했다. -p198

 

* 다경에서는 차를 우리는 물의 온도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바 있는데, 온도계가 없었던 당시에 물의 끓는 모습만으로도 다음과 같이 적당한 온도를 감지해 냈다. -p220

 

물이 처음 끓게 되어 공기 방을 소리가 나기 시작할 때에 일비(一沸, 처음 끓다)라 하고,

용기 가장자리에 공기방울이 샘솟듯 올라오면 이비(二沸, 두 번째 끓다)라고 하며,

파도치듯 수면이 요동치면 삼비(三沸, 세 번째 끓다)라고 한다.

삼비가 되면 먹지 못한다.

 

* 암운을 더욱 향유하기 위해서 바위의 기운인 암골(岩骨), 목 넘김 후의 후운(喉韻), 구강의 밑 부분인 취저(嘴底), 그리고 마시고 난 빈 잔에 남아 있는 진한 향기인 배저향(杯底香)까지 느끼게 되면 암차와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p222

 

* 무이암차의 보관 방법

 

차의 보관 방법은 차의 종류에 따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이암차는 비교적 발효가 많이 되고 화공(火功)을 충분히 받은 차이므로 저장하기가 편하다 . 저장하는 동안 맛과 향도 더욱 깊어져서 햇차보다는 오히려 한해 정도 묵은 차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이암차는 묵은 차가 더 비싼 값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무이산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p230

 

家家賣弄隔年陳 집집마다 지난해 묵은 암차를 맛있다고 자랑하네.

 

 

    

단어

 

* 무이산의 지리적으로 붉은 노을의 빛깔을 띤 단하(丹霞)지형에 속한다.

 

- 단하(丹霞) : 붉은비의 운기(雲氣)

 

* 옛 양선차는 쪄낸 다음 덖지 않고 홍배(烘焙)를 거치는데 반해, 송라용정(松蘿龍井)은 덖기만 하고 홍배 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무이암차는 덖는 과정과 홍배 과정을 모두 거치는데, 제다가 완성 되었을 때 보면 청색과 홍색을 하나의 찻잎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이때 청색은 덖음 과정에서 나온 것이고 홍색은 홍배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청나라 때 육정찬(陸廷燦)이 지은 속다경(續茶經)을 보면 무이산 청차 제다법에 관한 기술이 등장하는데, 반발효차인 청차 제다 과정에서 꼭 유념해야 할 점을 다음과 같은 사항을 내세웠다. - P43

 

半靑 半紅 찻잎이 반은 푸르고 반은 붉게

 

三分紅 七分綠 혹은 삼할은 붉고 칠할은 푸르게

 

綠葉紅鑲邊 또는 푸른 잎 가장자리에 붉은색이 박힌 듯

 

- 홍배(烘焙) : 건조 과정을 마친 차를 다시 약한 불에서 오랜 시간동안 서서히 건조시키면서 차의 향기를 북돋아 주는 과정을 말한다. 지역에 따라 탄배(炭焙), 복배(復焙)라고 하기도 한다.


원본글  http://blog.daum.net/ks61115/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