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이야기

나는 팽주다

무설자 2011. 7. 1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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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차 이야기

나는 팽주다

 

 

 

 

어느 찻자리든 팽주가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마시면 스스로 팽주가 되고 팽객이 되지요.

둘 이상이면 마주하고 앉아서 한 사람은 팽주가 되어 차를 우리게 될 것입니다.

 

차와 차도구, 그리고 팽주가 한 몸이 되어 차를 내고 팽객은 그 결과물인 차를 마십니다.

팽주는 한 사람이지만 팽객은 제한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우린 차가  마시는 사람이 여럿이면 누구를 의식해서 차를 우려야 할까요?

 

좋은 차 일수록 팽주는 차를 우리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차를 잘 아는 사람이 팽객으로 앞에 있다면 팽주 자리에 앉기가 부담스럽습니다.

팽객의 숫자가 많을수록 팽주는 차를 아주 주관적으로 우려야 합니다.

 

팽주의 자리에 누가 앉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팽주가 되는 자리는 찻자리를 주관할 때일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라면 소위 고수라고 하는 분이 팽주가 되기 쉽겠지요.

 

찻자리를 책임진다고 할 수 있는 팽주의 역할은 조심스러우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조심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팽주의 역할을 다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팽주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차를 내어야만 팽객에 대한 부담을 지울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지극한 주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가장 주관적인 것이 가장 객관적이라는 논리를 내세워봅니다.

마시는 사람마다 기호가 다른 차가 모든 이에게 만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차와 그릇을 잘 알아서 그야말로 조화로운 차를 우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라야 최고의 팽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갖춘 분을 팽주로 모실 수 없을지라도 팽주가 있어야 찻자리가 성립이 되지요.

팽주가 갖춰야 할 자격에는 못미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아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팽주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그 찻자리를 주도할 가장 중요한 역할을 위임받는다는 것입니다.

찻자리란 차를 매개체로 만남을 가지는 것이기에 차는 모임의 성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소재일 것입니다.

그런 차를 내는 소임인 팽주의 자리를 무소불위의 자리라고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팽주는 찻자리에 준비한 모든 차를 평등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준비한 다양한 차를 우리는 자리라면,

특히 팽주가 차를 보는 시선은 높고 낮음이나 귀하고 천함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끔 다회에서 팽주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마음을 지니며 차를 우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팽객이  팽주를 대하는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팽주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하며 팽주가 내는 차에 대해 폄하하는 표정이나 말을 내뱉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팽객이 팽주의 자리를 '무소불위'의 자리로 인정할 때 찻자리의 의미가 살아나고 차와 사람이 어우러집니다.

 

누구든 팽주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찻자리라야 정이 넘치고 사람 냄새가 차향보다 향기로울 것입니다.

찻자리에서 내가 팽주로 앉을 때마다 중얼거립니다.

'나는 팽주다'

 

 

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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