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가을이 오는 길목에 서서

무설자 2008. 8. 2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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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이라는 창은 다 열어놓고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제는 창문을 다 닫고도 불김을 조금 넣고 잠자리에 듭니다. 아직 한낮에는 에어컨도 틀고 선풍기 바람도 쐬면서 작업을 하지만 가을이 창문너머로 기웃거리는 걸 느낍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참 묘합니다. 딱히 누구라고 집어서 떠오르지는 않지만 괜스레 누군가 그리워지고 그가 보낸 편지 한통이 배달되어 올 것만 같습니다. ‘보고 싶은....’라고 시작되는 그 옛날 아내에게 받았던 편지, 마음 설레며 봉투를 뜯던 그런 편지가 배달될 것 같은 상상을 하면 공연히 마음이 부풉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허공중에 떠다니던 추억이 가을바람에 묻어 편지처럼 배달되는 것일까요?

 

답장을 미리 써놓고 올 편지를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병훈련소에서 그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도 짝사랑하던 여자아이가 편지를 보내줄 거라며 기다렸지요. 한 장, 두 장, 석 장...그렇게 훈병수첩에 깨알같이 답장만 써놓고서 기다렸지만 그 편지는 끝내 오지 않았지요. 그렇게 써보던 그 옛날을 돌아봅니다.

 

가을날은 괜히 그런 설레던 추억꺼리를 끄집어내 봅니다. 이런 막연한 그리움은 연정도 아닌 가을을 맞이하는 의식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같은 마음이 가을날에 일지 않는 이는 추억이라는 행복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닐까요.

 

 


차茶

지난 몇 년간 차에 삶의 고단함을 담아 마셨습니다. 설계 일이 메말라서 마음이 번잡할 때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알게 했습니다. 그 속에서 차를 배우고 삶을 나누고 저 멀리 중국과 우리나라 곳곳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불교가 깔고 있던 제 생활의 저변에 차가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관념으로 채우고 있던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라는 매개체가 들어오면서 더 풍성한 신행이 가능해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매일 차를 마시면서 차가 주는 의미와 삶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차나무는 제 몸을 뜯기고 생잎을 생채기를 내서 마를 데로 말린 차, 거기다 뜨거운 물에 담겨 제 속에 있는 속내를 뽑아 줍니다. 그런 차를 마시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만들어 올리면 제 글에 동의하는 이들이 표현하는 얘기로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차를 통해 얻게 된 마음의 평정, 그리고 같은 정서를 가진 이들과의 대화를 통한 만남으로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연기의 이치를 봅니다. 고통은 오롯이 느끼는 삶의 모습입니다. 향기로운 차맛은 차가 지닌 고통의 표현입니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없는 이는 제대로 차맛을 느낄 수 없으니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돌아보게 됩니다.

 

 

결실

이 가을에 나는 무엇을 수확할 수 있을까 돌아봅니다. 올해도 연초에는 부지런히 파종을 했습니다. 작년에는 제대로 거둔 것이 없어서 큰마음을 먹고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했었지요. 돌아보니 올해 수확은 새로 사람을 많이 알게 된 것입니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없는 사람들을 오랜 지기처럼 알게 되는 것은 참 희유한 인연입니다.

 

지난 몇 년간 일감이 부족하여 일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고통이 얼마나 큰 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물 위에 떠있는 얼음을 딛고서 있는 것 같은 상황이라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그대로 빠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죽음이라는 명제가 마음 하나에 오가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삶이 무엇이냐는 화두가 성성한 수행 그 자체인 그런 시간 속에서 귀한 사람들이 다가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열리는 인터넷이라는 세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만남을 보았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의 교우, 차茶라는 매개로 마음이 열리고 내게 다가오는 인연의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보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사람들, 이제는 그들이 제가 아는 사람들의 반입니다. 그 분들과 제 일의 만나지기도 합니다.

 

요즘 제 분야의 일은 너무 부족합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던 일이 사무실 문을 열고 찾아옵니다. 잊고 있었던 오랜 인연의 사람들이 새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귀한 일들을 진행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듯 그렇게 여여如如하게 살아가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아직은 가을이 낮에는 푸른 잎사귀 뒤에 숨어있다 밤이 되면 열어놓은 창을 넘어 살포시 찾아듭니다. 가을 냄새를 담은 바람이 거실을 채우면 차호茶壺에 찻잎을 넣고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에서 끄집어 낸 생각을 놓아봅니다. 이 시간은 잘 우린 차 한 잔이면 족할 뿐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송광사 부산분원 관음사 사보 '늘 기쁜 마을' 0809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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