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남의 소를 세는 사람

무설자 2008. 9. 1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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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침이면 집을 나가서 남의 목장에서 하루 종일 소를 세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얼굴에는 수백 마리를 세고 난 뒤의 충만감으로 가득했지만 제 집에 있는 소 한 마리가 허술한 외양간을 밀치고 도망간 것은 며칠이 지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집에 있는 소 한 마리와 남의 목장에 있는 수백 마리의 소를 비교하면 어떤 소가 더 중요할까요?  한 마리밖에 안 되지만 내 집의 소가 더 중요할 테지요. 마리 수가 많다고 남의 목장에 눈이 팔려서 하루 종일 목장에 나가서 소를 세고 있는 이를 본다면 당연히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탓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온전히 내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요? 이런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명예를 추구하고, 명예를 가진 이들은 그것을 통해 재물을 추구합니다. 학력 또한 재물이나 명예를 얻기 위한 과정으로 삼지요.


주변의 많은 인간관계들도 결국 이러한 명예나 재물을 얻기 위함인 경우가 많지요. 욕심껏 재물을 취하지 못해서, 저절로 얻지 못해 억지로 만들어내는 명예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의기투합이 요즘 사람들의 만남으로 보입니다. 부모자식의 의미마저 그처럼 보이는 건  저의 어둔 마음 때문이겠지요.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고해라는 바다를 건너는 뗏목과 같기에 건너가면 버리라고 했습니다. 만약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라면 불법 또한 그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수천수만 마리가 있는 목장과 같습니다. 그렇게 많은 소를 기를 수 있음은 그 목장을 운영하는 사람의 노하우가 있는 것이지요. 내 집에 있는 소 한 마리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므로 그 목장에 가서 소를 제대로 키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십 년 씩 그 소들을 구경하고 올 뿐 제 소를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실 학력, 재물, 자식, 명예는 고통과 이어져 있습니다. 모두가 추구하지만 그 바람만큼 얻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고통은 아니지만 올바르게 관리하지 못하니 나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지요. 학력, 재물, 자식, 명예라는 소를 다 키우지만 그 소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소를 세다가 다 도망가 버리고 외양간을 바라볼 때는 이미 허물어져 있음을 알게 되어 후회를 하고 맙니다.


몇 년 전부터 보이차를 열심히 마시고 있습니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이차는 여러 종류의 차와 오랜 기간을 보관하여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단순히 마신다는 의미를 넘어서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차를 잘 마시는 만족함을 누리기보다는 더 좋은 차에 곁눈질하거나 더 많은 종류의 차를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생기게 되더군요.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욕심 때문에 고통에 빠져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셔서 얻는 기쁨보다 더 좋은 것을 많이 가지지 못함에서 일어나는 괴로움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차를 마시는지를 잘 살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차를 잘 음미한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 차를 잘 살피지는 않고 자꾸만 다른 이들의 차를 곁눈질 합니다.


마시는 기쁨의 정도는 차를 얼마나 아느냐에 비례하지 않는데 차에 대한 지식이나 값나가는 차에 대한 욕심만 키워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차에 대한 지식을 높이기보다는 차를 마셔서 얻어지는 만족함을 높이기 위해 차를 잘 마시는 사람을 찾으려고 합니다. 차를 제대로 마시는 분을 만나니 의외로 그분들은 지식이 많다거나 많은 양의 차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


가을은 눈에 보이는 결실을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만들어진 것들이 없어지는 계절이기도 하더군요. 얻어지는 것은 모두 다 쓰일 데가 있는 것이지요. 남의 목장에 있는 소들도 바라보는 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쓸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학력, 재물, 자식, 명예나 차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올바르게 써야만 모두가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온 산에는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황홀경에 빠지고 들녘에는 풍성한 결실로 풍년가가 울려 퍼지지만 곧 세상은 텅 비어 버릴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즐기고 배부름에 만족함도 잠시일 뿐 내 것이 아니라는 허탈감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아까 웃으며 바라보았던 남의 소를 세고 있는 그 사람이 내가 아닐까요? 가을은 찬찬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계절입니다.  (2008,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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