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이야기/에세이 차 이야기

차를 주문하며

무설자 2006. 1. 2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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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차 이야기 0601

 

차를 주문하며

 

 

차 마신지 20년, 그런데도 아직 차맛을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차를 마시는 건 다관에 찻잎을 넣고 물을 부어 우려서 찻잔에 따라 마시면 된다.

그렇게 해도 차를 마신다고 할 수 있지만 제대로 향미를 안다는 건 별개이다.

물 먹듯 마신다면 차와 입만 있으면 되겠지만 차를 제대로 마시기 위해선 다른 게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차를 알아야 하고 그릇을 살필 수 있어야 하며 찻자리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중국에는 차 종류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는데, 찻그릇 또한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 많은 차와 그릇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출 것 까지는 없을지라도 차를 제대로 내기 위해 차와 그릇의 대강은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가까이 하되 귀하게 여기지 못하면 음료를 마시는 정도이지 차라는 문화와 어우러지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꽤 오래 차를 마셨다고는 하지만 차나 그릇을 알려고 하는 노력은 그 세월에 비해 너무 모자랐었다.

보이차는 스스로 구하기보다는 주변에서 나누어 주는 걸 얻어서 해결해왔었다보니 진지하게 차를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다보니 보이차, 우롱차, 철관음 등으로 대분류를 했었지 이래서 좋은 보이차, 저래서 괜찮은 철관음 등으로 나누어 살필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릇  또한 손에 잡히는 대로 주전자로 생겼으면 그 그릇에 차를 우렸고 잔으로 보이면 그 그릇에 차를 담아 마셨다.

중국차를 마신 지 그럭저럭 몇 년이 되었지만 변변한 자사호 하나 갖추지 못했다.

자사호를 생차와 숙차를 구분해서 써야 한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았다.

 

차를 마시는 마음을 가진다 함은 정성을 다해 차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시고 싶은 간절함으로 차를 찾아야 하니 그건 그 차를 어떻게 구했느냐에 따라 그 기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차를 조금 얻어서 마시게 되면 어떠할까?

서너 번이면 다 마셔버리는 분량이라면 한 번 우릴 때마다 마음이 설레고 차를 따르는 손이 떨리지 않겠는가.

 

매번 마음이 설레고 손이 떨리는 차 자리,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그런 차를 마실 수 있길 바란다.

제대로 차를 마신다고 하는 건  좋고 나쁘다며 차를 탓하기보다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 것이리라.

그냥 구할 수 있는 차, 아무 그릇에나 내는 그 마음으로 마셔 온 나의 차 생활은 제대로 차를 마셨다고 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이번에 차를 주문하면서 어떤 이름을 대야할지 알 수 없었을 때 그동안 얼마나 무심하게 차 생활을 해왔느냐를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수십, 수백 종류의 차가 있는 중국에다 주문을 하려니 그냥 알아서 보내달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마음을 담아야 하는 건 차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일일지라도 그러해야겠지만 사람이라면 더 그러해야 하리라.

좋은 것, 귀한 것을 가까이하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깨달으며 이제 제대로 된 차생활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먼저 주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마음에 담아 살고 있지만 그 실천은 그러지 못했다.

차 한 잔의 의미를 살피게 되니 이제 비로소 보이차에 눈이 뜨인다.

좋은 차를 제대로 마시기 위한 마음가짐을 잘 살펴간다면 아마도 나의 삶이 올바른 방향을 찾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2006.1.22)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