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돌멩이의 자리

무설자 2005. 10. 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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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바람 때문인지 일요일 산에는 온통 사람 천지입니다. 나뭇잎 풀잎에 색이 들기 시작하고 억새가 바람결대로 물결처럼 흩날리니 사람들은 홀린 듯 집을 나와 산길 따라 줄을 지어 산을 오릅니다. 대부분 사오십 대로 보이니 건강을 위해 산행을 나선 듯 합니다.

 

젊은이들은 일요일이면 어디로 갈까요? 산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으니 시내를 가득 메우고 있겠지요. 아이들에게 산행을 권하면 힘들게 왜 산을 오르는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면박을 줍니다. 그들도 나이가 되면 산을 찾게 되겠죠.

 

하긴 아이들이 없어도 산은 만원입니다. 사람들이 즐겨 오르는 산길은 그들의 발에 시달려 몸살을 앓습니다. 길은 온통 파인 자국에다 풀도 나무도 남아나지 않습니다. 산을 오르며 사람들은 건강해지겠지만 산은 생채기를 입습니다.

 

산국山菊이 저만큼에서 피어 있습니다. 이름 모르는 노란 꽃도 한편에 무리지어 제 색을 뽐냅니다. 누구를 기다리며 피지는 않았으련만 사람들은 우리를 오라며 환영한다고 앞 다투며 산을 찾습니다. 가을입니다.


 

 

늘 찾는 길을 따라 산을 오릅니다. 숨어 있는 길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는 게 다행입니다. 아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바쁠 것 없는 여유를 가지며 오를 수 있는 우리들만의 은밀한 길입니다. 그래도 우리만 아는 길은 아닙니다. 몇 명만 아는 줄을 서 밀려서 가지 않아도 되는 숨은 코스입니다.

 

여름 내내 더위를 핑계로 산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에 생몸살을 앓는 산의 입장에서는 반길 리 없겠지만 아내와 나는 오랜만의 산행이 너무 즐겁습니다. 여름 내 찾지 않았지만 오솔길은 여전합니다.

 

여름내 오는 비에 씻겨 길이 팬 곳에 누군가 돌멩이를 채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길에도 돌을 이리저리 뿌리듯 던져져 있습니다. 아마 누군가 일부러 한 쪽에 치워둔 돌을 길에 깔아 놓은 듯 합니다. 사람들이 다니기에 불편하게 왜 이렇게 해놓았지 하며 돌멩이를 치우려고 하다가 잠시 생각을 해 봅니다.

 

언젠가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개울에 있는 돌을 모아 돌탑을 쌓으면 큰 물이 질 때 물길이 급해져 산사태가 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재미삼아 돌을 집어서 한 쪽에 모아 돌탑을 만들지만 돌이 없는 맨 흙은 저항이 없으므로 물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 흘러내리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어떤 이가 한 쪽으로 치워 놓은 돌을 길에 다시 되돌려 놓은 것일까요? 한발 한발 조심해서 내딛으니 산이 더 깊이 느껴집니다.


 

 

러시아 민화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른 봄, 농부는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하늘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늘이시여, 저는 여태껏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올 한 해는 저를 좀 쉬게 해 주십시오. 씨만 뿌려 놓으면 가을에 거두기만 하도록 해 주십시오.

 

농부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전해졌는지 그 해는 병충해도 없었으며 적당한 비가 내려주었고 잡초도 나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여름내 편히 지냈고 너른 들녘에 가득한 밀을 수확하기 위해서 부푼 마음으로 나섰습니다.

 

논에 가까이 다가간 농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밀알에 속이 하나도 차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밀알이 영그는 것은 비바람을 이겨내고 타는 듯한 햇볕을 받으면서 흘린 농부의 땀과 수고가 모인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나 어려움이 없는 세상을 살고 싶어 합니다. 불보살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도 사업 잘되고 가족 모두 건강하고 좋은 학교 들어가게 해달라는 내용 이외에 무엇이 있을까요? 하지만 그 기도는 모두가 욕심 덩어리 아닐까요?

 

사업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되어 돈이 많이 벌어진다면 그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몸을 돌보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도 늘 건강하다면 생활을 규칙적으로 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도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필요한 과정을 생략하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그런 궁리만 하고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결과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대부분 존경 받는 사람들은 어려운 과정 속에서 힘든 노력을 통해 결과를 만든 사람일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그런 노력을 통해서만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일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씨만 뿌려놓고 여름을 보낸 농부에게는 수확할 것이 없었던 것처럼 일 만 벌여놓고 과정을 만들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바라는 이에게는 얻을 수 있는 결실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려움의 크기만큼 대가가 나오는 것이 올바른 이치일 것입니다.

 

발길에 부딪치는 돌멩이가 길이 파이는 것을 막아주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산길을 사고 없이 산행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슬리퍼나 구두를 신은을 오르는 사람들을 간혹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길에 깔린 돌멩이는 귀찮은 존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등산화를 신은 사람들에게는 조심해서 산을 오르게 하는 소중한 파트너입니다.

 

산행을 우습게 여기는지 신을 가볍게 신은 채로 산을 오르는 이들을 가끔 봅니다. 그들은 등산화를 신은 이들보다 사고를 당할 확률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내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불러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에서 부딪히는 많은 장애들이 사실은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속도를 조절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애가 없는 삶이란 브레이크 없는 위험한 자동차가 달리는 상황 같을 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힘들게 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제 흐름대로 가고 있는데 내가 그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하면서 원망만 하고 있다면 분명 그 잘못은 내가 있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산을 오르면서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를 그대로 두십시오. 삶에서 부닥치는 어려움도 그대로 인정하면서 살아가야만 해법도 그 자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돌멩이도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이 있듯 내가 만나는 모든 일들이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이가 내 스승이며 내게 닥치는 모든 일들이 내 인생을 영글게 하는 소중한 과정일 것입니다.

 

빨갛게 물들어 가는 저 단풍은 내게 무슨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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