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오면 가는 가을에

무설자 2005. 9. 1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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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써서 기고했던 글입니다.

벌써 가을이 아직 따가운 햇살에 묻어나네요.

행복한 가을을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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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느껴지는 변화에 나는 가슴이 부풉니다. 뒷방 창문을 열면 풀꽃이 피우는 가을 향기가 섞인 바람이 온 집을 채우고 푸덕이는 산새들의 소리가 집 안에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높아지는 하늘 끝에 닿은 저 먼 곳으로 가 보고 싶지만 밥그릇에 묶인 생업이라는 짐무게에 눌려 출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로수들도 빨갛게 노랗게 제멋대로 옷을 갈아입고 억지로 출근하는 나를 놀리는 것 같습니다.

가을은 뭣인가가 어디론가 떠나도록 충동질하는 걸 느끼게 합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며 빨리 오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보고 싶다고, 이 가을이 올 때까지 당신을 기다렸다고 애타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차진 뒤에는 일요일마다 나들이에 나섭니다. 2주전에는 아내와 함께 여름내 오르지 못했던 우리 집 뒷산인 승학산을 올랐고 전주에는 우리 절 관음청신사회 식구들과 멀리 소록도를 다녀왔습니다.

승학산에도 사람들이 가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때문인지 산길을 따라 밀리듯 행렬을 지으며 몰려 왔습니다. 고속도로에도 차로 주차장을 만들 듯 나들이를 나섭니다. 가을이 집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저 뿐 아닌 것 같습니다.

떠나게 하는 계절, 가을입니다.

 

지천에 핀 가을꽃과 빨갛게 달린 열매들이 결실의 계절임을 느끼게 해줍니다. 아직 남쪽까지는 내려오지 않은 단풍이지만 풀잎과 꽃, 열매들로도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가을을 빨리 타는 나무는 울긋불긋 옷을 예쁘게 갈아입었습니다. 아직 푸른 숲 사이로 한두 그루는 단풍 옷을 입고 멋을 냅니다.

단풍이 가을산을 아름답게 장식하지만 정말 분위기 있는 가을을 연출하게 하는 건 억새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넘어지면서 물결치듯 흩날리는 억새밭의 풍광은 가을산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가을 민둥산이 만약 억새가 없다면 황량할 것인데 오히려 가을이기에 은색으로 번쩍이는 화려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야산 군데군데에 몇 포기씩 피어있는 억새꽃도 나름대로 운치를 만들어 냅니다. 마치 일부러 꽃꽂이 한 것처럼 들국화와 어울립니다. 바람결을 타며 흔들리는 억새가 없으면 가을풍경은 반감하고 말 것입니다. 들국화 같은 가을꽃과 단풍이 공간을 색으로 나타낸다면 억새는 흐르는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또 가을이 간다고 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합니다.

가을이야말로 한 해가 감을 시간으로 보여주며 남은 날들을 소중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계절입니다. 억새꽃이 온 산야를 뒤덮으며 보내버린 시간과 남은 시간의 교차점에 내가 서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나를 시간 속에서 돌아보게 하는 계절, 가을입니다.

 

 

억새밭에 서서 바람에 일렁이는 풍경을 봅니다. 햇살을 등지고 볼 때와 앞에 두고 보는 경치는 사뭇 다릅니다. 햇살을 등지고 보면 억새는 간 곳이 없고 넓은 평원만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반면에 햇살을 마주보며 억새를 보면 햇살에 비친 빛나는 억새를 보게 됩니다. 햇살이 억새를 뚫고 비치면 은빛이 부서지며 튀듯 억새꽃의 한 올 한 올이 살아나는 황홀한 장관으로 살아납니다.

햇살이 앞에서 비치느냐, 뒤에서 비치느냐가 완전히 다른 장면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햇살에다 정면으로 맞서면 장면이 지워져 버리고 햇살을 등에 업으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햇살이 뒤에서 비치면 줄기와 잎은 어두워지고 반투명한 억새꽃으로는 빛이 지나면서 그런 장면을 연출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앞에서 비치면 전체에다 반사하게 되면서 한 장면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뒤에다 큰 힘을 업고 나서면 나와 그 힘이 더해지게 되지만 그 힘에 정면으로 맞서면 나 하나만 있게 되어 작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솝 우화에서 여우가 사자를 뒤에 세우고 나타나니까 온 산에 짐승들이 놀라서 도망을 가는데 사자는 제 때문에 그런 줄 모르고 여우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햇살을 등에 업은 억새는 사자를 뒤에 둔 여우같이 대단해집니다. 억새밭에 가시거든 꼭 햇살을 억새 뒤에 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내가 하나 되면 행복한 계절, 가을입니다.

 

 

여름과 겨울의 가운데 서서 무상을 느끼게 하는 가을입니다. 가을의 아름다움에 빠져있다가는 순식간에 추운 겨울을 맞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계절이기보다는 마음으로 느끼는 계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아름다움의 극에는 곧 스러지는 슬픔이 함께 숨어 있습니다.

 

다 피어버린 꽃은 곧 져야하는 운명이 따르는 것처럼 이 아름다운 계절은 언제 왔느냐고 묻자말자 곧 가버립니다. 추운 겨울이 또 아름다운 계절인 봄을 담아 키우겠지만 그 봄이 익기까지는 견디기 힘든 시련의 시간을 겪어내야 합니다.

아름다워서 시린 계절,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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