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어떤 프로

무설자 2005. 9. 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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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점심을 먹기 위해 한참을 걸어 나왔다. 매일 무엇을 먹을까하는 끼니 해결도 꽤나 귀찮은 고민거리다. 사무실이 주택가에 있다보니 시켜먹지 않으면 한참을 걸어 나온다. 걷는 걸음 수만큼 선택의 폭은 커진다.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면 그냥 자장면이나 시켜먹으면 제 격인데 기어이 십여 분이나 걸어 나온 건 점심약속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우산으로 비를 가리려하니 삐져나온 어깨나 무릎 밑으로 비를 맞는 건 감수할 수밖에 없다. 바람마저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불어제치니 입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그냥 나온다. 이게 다 차라는 놈에 길들여 있어 이제 걷는 일마저 궂은 날, 좋은 날을 가린다.

 

  비 오는 날은 차라고 생겨 먹은 건 다 끌고 나오는지 출근길에 온 도로가 다 차로 꽉 차 있다. 비 맞고는 못 걷겠다 이거지.

 

  약속장소까지는 시장을 거쳐서가야 한다. 못골 시장, 옛날에는 대연동 일대에서는 제일 큰 시장이었지만 이제는 마트에 밀려 명맥만 유지하는 것 같다. 한참 때는 이 길로 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야단법석이었는데 이제는 길가로 밀려나 차가 다닐 자리를 내준 듯이 한적하다.

 

  점포 앞에 펼쳐놓은 야채나 과일 전이 거의 전부다. 비가 오는데도 노점은 그대로 야채나 과일에 비를 맞추면서 손님을 기다린다. 그 노점의 주인들은 대부분 할머니들이다.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이 가득하다. 이 할머니들이 장사를 그만두면 이 시장도 문을 닫겠지.

 

  점심시간이라 파라솔-큰 우산이라고 해야 하나?-로 비를 피해 앉아 식사를 하고 계시다. 그런데 그 파라솔도 없어 큰 우산으로 비를 피해 앉아 있는 분도 계신다. 가만히 보니 할머니는 우산의 가운데에 앉아 있지 않고 한쪽으로 비켜 앉았다. 진열해 놓은 야채 중에 중요한 것을 비를 맞히지 않기 위해 당신은 한쪽으로 비를 겨우 피하고 다른 쪽으로는 맞고 있지 않은가? 파는 물건에는 우산을 씌우고 당신은 비를 맞으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니 비 좀 맞는 게 싫어 투덜거리며 걸어온 것이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하지만 그 할머니를 불쌍하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분은 그 자리에서 십 년, 아니 몇 십 년을 그렇게 앉아서 아이들을 키웠으리라. 먹이고 입히고 대학도 보냈으리라. 그 아이들이 박사학위도 받았을 지도 모르고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분도 있을 지도 모른다. 얼마 전, 늦은 밤에 택시를 탔을 때 칠순이 넘은 기사 분이 그 택시 일로 아이 셋을 대학교수도 만들고, 카이스트 박사도 만들었다며 아주 자부심이 대단하셨던 기억이 있다.

 

  파는 물건을 귀히 여기고 당신은 기꺼이 비를 맞는, 당당한 프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 할머니는 그 어떤 프로와도 맞댈 수 있는 훌륭한 프로다. 비 오는 날이라 궂은 날씨라고 투덜거리면서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내 모습을 보면서 아직 나는 멀었구나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얼마나 내 일에 집중하고 있는가? 일을 돈 가치로만 따져 돈 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로 구분하여 단 것은 먹고 쓴 것은 뱉으려 하지는 않는가? 단 것은 단대로 쓴 것은 쓴 대로 몸에 필요한 법인데, 먹기 좋다고 단 것만 즐겨 먹으면 건강이 나빠지듯이 일도 내가 필요한 일만 가려서 하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란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 평상의 모습에서 문득 드러나는 그 분위기로 여여하게 다가와 감동에 젖게 한다.

 

  나는 다른 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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