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를 마신 지 19년이 되었다. 보이차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숙차였다. 2006년에 접했던 생차는 녹차 같은 탕색이었지만 쓰고 떫은맛이 많아서 마시기 어려웠다. 숙차는 발효 과정을 거쳐 떫은맛을 줄여 나온 차라서 편하게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생차를 마시고 있으니 보이차를 시작하고 십 년 간 숙차만 마셨던 차 생활에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내가 하룻동안 마시는 차를 양으로 잡아보면 3리터 이상이다. 아침 식전에 숙차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해서 오전에는 녹차, 오후에는 홍차, 생차를 마신다.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나면 생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차를 마시면 하루가 무료한 시간 없이 꽉 채워 보내게 된다. 설계 작업을 하면서도 차를 마시며 생각을 다듬고 글을 쓰면서도 찻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소재를 떠올린다.
숙차는 누구라도 마시기 편한 대중적인 차
숙차는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대엽종 찻잎의 쓰고 떫은맛은 줄어들고 단맛은 더해져 부드러운 향미를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차이다. 커피로 치면 카페에서 여러 종류 원두를 병배해서 가성비를 높여 맛있게 만든 아메리카노 같은 차라고 할 수 있다. 숙차는 조수악퇴라는 발효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데 낮은 등급의 찻잎을 써서 만드는 차가 많아서 가격도 저렴하다. 숙차는 경제적 부담 없이 누구나 마실 수 있어서 보이차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생차는 대엽종 찻잎으로 일차 가공해서 만들어진 쇄청모차를 그대로 덩어리차로 만든다. 그래서 생차는 차 산지마다 찻잎은 다른 향미를 지니는 데다 보관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차 성분의 변화가 계속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생차는 찻잎 그 자체의 향미를 즐긴다고 햘 수 있어서 숙차에 비해 고급 모료를 써서 만든다. 커피에 비유하면 나라 별로 다른 스페셜티 커피에 해당하는데 게샤나 블루마운틴이 고가라는데 주목하면 되겠다.
보이차를 처음 접하면서 숙차부터 시작하게 되는 건 가격이 저렴하면서 누구라도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357g 한 편이면 두 달은 족히 마실 수 있고 5g으로 두세 사람이 실컷 마셔도 된다. 숙차로 얻을 수 있는 건강상 이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가성비와 몸에 좋은 건강 음료로 선택의 폭이 넓다고 하겠다. 보이차를 마시지 않는 일반인들은 숙차만 보이차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보이차를 마시게 된 인연을 추적해 보면 아마도 숙차를 접하게 되면서 차 생활을 하게 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숙차로 보이차 생활을 시작했지만 시간차가 있을 뿐 결국에는 대부분 생차로 옮겨가게 된다. 숙차는 편하게 마실 수는 있지만 차의 향미를 즐기기에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일 것이다. 2010년경부터 팬덤처럼 밀려온 고수차 열풍으로 생차가 묵혀야 마실 수 있는 차가 아닌 만든 그해부터 마시는 보이차로 자리 잡게 되었다.
생차는 나 홀로 집중해서 마시는 독존의 차
숙차가 1973년 개발된 젊은 차라는 걸 얼마나 알까 싶다. 차 종주국인 중국에서 가장 늦게 개발된 차가 숙차이다. 그래서 숙차는 현대 보이차로 부르는데 해마다 발효기법이 달라지고 고급 모료를 쓰는 프리미엄 차가 많아지고 있다. 굳이 다른 차를 마시지 않고 숙차만 마셔도 좋다고 할 정도로 향미가 좋아지고 있다. 숙차가 전통 보이차라는 생차의 서자庶子 취급을 받지 않고 새 가문을 열어도 될 만큼 독자 노선을 열어가고 있다.
대중적인 숙차와 달리 생차는 수많은 갈래로 마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다. 대중들이 선호하는 차가 숙차라고 한다면 생차는 내가 좋아하는 차라는 개성이 뚜렷한 특성을 가진다. 생차를 구별해서 보자면 대지차와 고수차, 소수차와 고수차, 봄차와 가을차, 맹해차와 임창차, 신차와 노차 등으로 수많은 갈래로 차마다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차는 보이차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어야만 내가 마실 차를 선택할 수 있다.
이른 봄차인 첫물차로 노반장이나 빙도노채 차는 만들어진 그 해에 한 편 값이 수백만 원인데도 오리지널 차는 구하기가 어렵다. 숙차는 프리미엄 급이라 해도 수십만 원인데 생차는 수백만 원이니 아마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같은 이름의 생차가 백배나 차이를 보이지만 비싼 값을 치르고 구입하는 마니아 층이 있다. 그래서 생차 마니아들은 숙차를 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노차는 오직 생차가 숙차와 구별해서 가지는 특별한 차의 갈래라고 할 수 있다. 보이차에서 숙차는 만들어서 바로 마시는 차라고 한다면 생차는 묵힐수록 가치를 더하는 차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수차는 묵혀서 마시는 차가 아니라 만든 그 해에 마셔도 좋고 묵히면 그 세월만큼 달라진 향미를 즐길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홍인으로 대표되는 인급차는 백 년 가까운 세월로, 호급차는 마시는 차가 아니라 골동차의 신비감을 간직하고 있다.
산지 이름이 같은데 3만 원, 30만 원, 300만 원
보이차 생차가 한 편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 차를 들자면 두 곳 산지를 떠올릴 수 있다. 노반장과 빙도노채인데 보이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이 두 곳 산지의 차를 소장해서 마시고 싶어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이 두 곳의 차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어린 차나무인 소수차에서 늦은 봄에 잎을 따 만든 차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령 500년 이상 차나무에서 첫물차로 만든 차라면 가격도 그러하지만 진품을 찾아보기 어려워 아무나 마실 수 없다. 만송 왕자산 고수차는 차의 향미가 빼어난 데 생산량이 너무 적어서 일반인들은 물론 차상茶商들에게도 그림의 떡인 귀한 차다.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찾는 사람은 줄을 서니 부르는 게 값이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다고 하니 가히 독존의 차라 할만하다.
만약에 노반장이나 빙도노채라고 해도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진품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진품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노반장이나 빙도노채를 마셔볼 기회를 가진다고 해도 그 향미에 감탄할 수 있을까? 보이차는 향미가 직접적이지 않아서 생차를 오래 마셔온 사람이 아니면 그 차만의 향미가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결국 생차는 개성이 뚜렷하지만 그 차의 향미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값을 치를 수 있다.
보이차는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구입하고 또 구입하는 전철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한탄하곤 한다. 보이차를 잘 안다는 건 사야 할 차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보이차는 종류가 무한하다고 할 정도로 많고 음미할 수 있는 향미도 넓고 깊다. 그래서 여러 차류의 갈래에서 귀결되는 종착점이 보이차라고도 한다.
보이차를 마시게 되면 숙차는 쉽게 접근할 수 있지만 생차는 방향을 잡기 어려워서 시행착오를 끝없이 반복하게 된다. 생차를 마시면서 궁극의 차를 만나게 되면 더 좋은 차를 찾는 방황을 끝내게 된다. 궁극의 차란 더 이상 욕심을 낼만한 차가 없는 차를 이른다. 만약에 그런 차를 마시게 된다면 더 이상 더 좋은 차를 찾지 않고 편안하게 깊이로 침잠하는 차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보이차는 처음에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내게 된다. 후발효 차라는 덫에 걸려 어떤 차라도 오래 묵히면 좋은 차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양만큼 나중에 보배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의 차'를 만나게 되면 그 생각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게 된다. 보이차 생차로 차 생활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인생이 보인다. 그래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무설자의 보이차 이야기' 19
원문읽기 :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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