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풀어 쓰는 건축이야기

주는 대로 받는 설계비, 받아야 할 설계비

무설자 2023. 5. 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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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건축사협회는 건축설계비의 민간대가 법제화를 올해 주요 사업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석정훈 회장은 민간 설계 대가가 1990년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사실 지금의 설계대가로는 건축사라는 전문가의 정체성마저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건축사의 대한건축사협회 의무가입 법제화를 이루어낸 석정훈 회장의 저력을 보면서 건축사 민간대가의 법제화도 이루어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건축설계비 민간대가가 법제화되더라도 건축사들의 자유 경쟁으로 정해지는 설계비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설계비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도 있어야 견적서를 작성할 근거를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필자 설계 부산 서구 동일교회-교회 설계비도 평당 단가로 계약한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견적을 넣는 건축사는 제대로 설계를 할 수 있을까?

 

 건축물을 짓는데 건축사의 업무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보아야 할까? 평당으로 책정되는 현재의 설계비를 보면 건축행정 첨부 도서 작성비 정도로 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설계비는 건축 허가를 받는데 소요되는 기본도면을 작성하는데도 부족한 지경이니 건축주에게 건축사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있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를 지난 50년대에는 건축사의 업무를 행정대서사가 했었다고 한다. 아직도 건축사를 건축행정을 보는 정도로 인식하고 그 업무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30여 년 전 설계 대가를 받으면서 건축사가 해야 할 업무 범위를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지 동료 건축사들에게 묻고 싶다.

 

 법제화되어 있는 공공건축물 설계비와 시장경쟁으로 결정되고 있는 민간 건축물 설계비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물론 공공건축물은 설계 과정과 설계 도서를 작성하는 기준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공공 건축물과 민간 건축물이 달리 지어지어져야 하는 건 아닐 텐데 설계 과정과 설계비는 왜 차이가 나야 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부산에만 1100명이 넘는 건축사가 있다. 이렇게 많은 수의 건축사들이 지금의 설계 대가로 어떻게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건축이라는 일의 매력에 이끌려 건축학과를 선택했다가 건축사로 살아가는 힘든 현실을 알고 나서 진로에 고민하는 후배들을 보기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설계비를 책정하는 근거는 건축물의 용도나 규모도 중요하지만 설계 기간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건축주가 설계 의뢰를 하면서 이런 요구를 한다고 보자.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단독주택, 임대인이 장사가 잘 되어서 임대료를 잘 받을 수 있는 근린생활시설을 설계해 달라고 한다. 이 설계 조건을 받아들이려면 설계비를 얼마나 받아야 할까?

 

 건축주의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단독주택, 장사가 잘 될 수 있는 근린생활시설로 설계할 수 있을까? 단독주택을 지으면서 가족들의 행복을 꿈꾼다는 것, 근린생활시설을 짓는 목적이 더 높은 임대수익을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건축사들은 건축주의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건축물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들의 행복과 최고의 임대 수익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그 조건을 담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용도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건축물을 지으려는 목적이라는 소프트웨어에 관해서도 그렇지만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시공비나 준공 이후의 유지 관리도 건축사의 설계도에 의해 결정된다. 건축사의 업무 범위는 건축주가 집을 짓는 전 과정에 전문가로서 업무를 대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건축사의 업무 범위를 이렇게 잡는다면 설계 기간은 아무리 늘린다고 해도 부족할 테니 설계 대가는 어떻게 책정되어야 할까?  

 

필자 설계 여수 주택, 설계기간 2년으로 건축주는 건축사의 설계비 견적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혼신의 힘을 다해 작업할 수 있었다
 

 

 지금의 말도 안 되는 이런 설계대가의 현실은 건축사가 해야 할 본연의 업무를 다하지 않은 우리 탓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설계비를 제대로 받지 못하니 받는 그만큼 밖에 일을 할 수 없지 않으냐고 항변하기 전에 그 설계비는 수주 경쟁으로 건축사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않은가? 감리 업무를 설계자와 구분하는 노력을 통해 법제화시켜 감리비를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감리자가 현장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건축사의 업무 대가는 건축주가 만족할 수 있는 성과가 나올 때 제대로 일 할 수 있는 비용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 우리 건축사들의 바람을 담아 대한건축사협회의 노력으로 민간 설계대가 법제화가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만약 민간 설계 대가가 법제화되었다고 해도 설계비를 지켜내는 건 오로지 건축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

 

-건축사신문 2023년 5월호 시론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