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세상 이야기

퇴고하고 또 퇴고하라

무설자 2023. 1. 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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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나 일상을 기록하는 글은 자유롭게 아무렇게나 써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블로그나 페북 등 SNS에 올리는 글은 그렇지 않다.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글이어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좋아요’ 수를 살피게 되고 댓글로 공감의 느낌을 표현해주길 바라게 된다. 내가 바라는만큼 반응이 없다 보면 글을 올려도 재미가 없어서 오래 지속하지 못하게 된다.

 

SNS 활동은 자의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타의에 의해 지속 여부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공개되는 글은 결국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일상의 소재로 글을 쓰지만 온전히 내 감정에만 몰입하기가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내 감정에 치우쳐 글을 쓰다가도 중간중간 깨어나야만 한다. 그러니 독자를 의식하는 그만큼 내 생각이 희석된다고 보면 되겠다. 

 

내 생각과 독자의 시선이라는 간극은 냉정하다. 내 생각이 독자의 관점과 다르게 되면 글이 외면받거나 악플이라는 필화를 겪게 될 수도 있다. 내 글이 올라갈 때마다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 좋아요와 댓글이 늘게 되면 글쓰기가 잦아지고 온라인의 인간관계도 확장되게 된다.

SNS를 통해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SNS라는 수단이 있어서 꼭 등단을 해야만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있으면 작가가 되고 책도 낼 수 있다. 글을 어떻게 써야 내 글에 공감하는 독자가 늘 수 있을까? 그 답은 간단한데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면 된다.  

 

공감대가 넓은 글을 쓰고 싶다면 처음 쓴 글을 고치고 또 고쳐 쓰는 퇴고라는 과정을 글쓰기에 더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퇴고라는 과정은 의외로 부단한 인내를 요구하므로 감내하기가 쉽지 않다. 빛나는 돌덩이인 원석이 초고라면 세공사의 손을 거쳐 보석으로 탄생하듯이 퇴고推敲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초고의 허점이 승화되어 괜찮은 글이 될 수 있다. 누구나 글재라는 원석을 찾아낼 수는 있지만 세공사의 세공 과정에 해당하는 퇴고推敲를 더해야만 보석 같은 글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조숙지변수(鳥宿池邊樹) -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당나라 때 시인 賈島가도의 서경시다. 이 시의 바깥쪽 '승고월하문'이 처음에는 '승퇴월하문'이었다. 그런데 '승퇴월하문'을 아무리 읊어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밀 퇴(推)'*자 대신으로 생각해낸 것이 '두드릴 고(敲)' 자였다. 그래서 '승고월하문'이라 해보면 이번엔 다시 '퇴'자에 애착이 생긴다.  

    

퇴로 할까? 고로 할까? 정하지 못한 채, 하루는 노새를 타고 거리로 나갔다. 노새 위에서도 퇴로 할까? 고로 할까? 열중하다가 경윤(京尹)*행차가 오는 것도 몰라서 그만 부딪치고 말았다. 이윽고 경윤 앞으로 끌려간 가도는 퇴로 할까? 고로 할까? 생각에 빠진 나머지 미처 행차가 오는 것도 몰랐다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에 경윤이 파안일소하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그건 '퇴'보다 '고'가 나을 것이네"라고 하였다. 이때 경윤은 다름 아닌 당대의 문장가 한퇴지(韓退之)였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이름을 알고 그 자리에서부터 문우가 되었으며, 가도가 ‘승퇴월하문’을 한퇴지의 말대로 ‘승고월하문’으로 정했음은 물론이다. 이로부터 훗날 사람들은 글을 고치는 것을 '퇴고'라고 부르게 되었다.  

   

*밀추(推)가 대표 소리이지만 밀 퇴(推)로도 읽는다.

*경윤(京尹):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옛날 벼슬이름     

                                                                         -출처 : 이태준의 문장강화-랜덤하우스 코리아     

 

글을 쓰면서 퇴고를 계속하다 보면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데 바쁘게 쓰다 보면 비문인지 아닌지도 분별하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만다. 문장의 길이에 따라 전달하는 의미의 강도나 느낌을 달라지기도 하니 퇴고는 몇 번이 아니라 아무리 많이 해도 모자라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겠다. 명문이라 회자되는 글은 아마도 상상할 수 없이 수많은 퇴고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퇴고란 내 감정에 빠져서 시작된 초고가 환골탈태하여 독자가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글로 승화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퇴가 좋을지 고가 좋을지, 퇴고가 되었다가 고퇴가 되었다 하는 至難지난한 글쓰기의 과정을 나는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을까? 일필휘지로 갈겨쓰고는 남에게 읽으라며 던지고는 좋은 평을 바라는 게 바로 내가 아닐까 싶다.     

 

 

 

오로지 내 생각으로만 글을 짓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쓴 글도 SNS에 노출되면 독자들의 시선을 통해 냉정한 심판을 받게 된다. 내 생각 내 의지대로 몰입하는 것도 글의 깊이를 더하는데 중요하지만 글을 읽어주는 사람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써서 퇴고를 오래 할수록 공감대가 넓은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