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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녀 건축사가 되는 날

무설자 2021. 5. 1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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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녀 건축사가 되는 날

 

 

26569, 건축사자격시험 발표일을 하루 앞두고 딸이 수험번호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아빠가 합격여부를 물어보지 말고 직접 확인하시라는 거다. 딸은 시험에 두 번을 떨어졌다보니 혹시 불합격이 되면 대답하기가 민망해서 그러는 것이리라.

 

아침에 일어나자말자 스마트폰으로 2021년 건축사자격시험 결과를 검색했다. 뉴스 란에 6,591명이 응시해서 6.5%430명이 합격했다는 기사가 나와 있다. 작년에는 전반기 시험에서 무려 1,306명을 뽑았는데 올해는 합격자 수를 많이 줄였나 보다.

 

합격자는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검색창의 스크롤을 내려 보니 건축사학원에서 합격자 수험번호를 올려놓았다. 이번 합격자는 수험생 대비 6.5%의 합격률이다 보니 번호가 백단위로 띄엄띄엄 보여 긴장하며 2000 대를 찾아내려갔다. 26569번이 보였다. 합격이구나.

 

 

30여 년 전 내가 건축사 자격시험 수험생이었을 때는 수험번호를 직접 확인할 수 없어 학원에 전화를 해서 알아보았었다. 첫 번째, 두 번째 학원에서 번호가 없다는 목소리를 듣고 믿을 수 없어 다시 전화를 걸어 세 번째 학원에서 합격을 축하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합격했다는 결과를 듣고도 두 번이나 번호가 없다고 들었던 지라 온전히 믿기지 않았다. 부산건축사회로 달려가 벽보에서 직접 번호를 확인하고 합격이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합격자로 있었던 내 수험번호를 두 군데나 학원에서 없다고 했을까?

 

딸은 두어 시간이 지나 전화로 시험성적까지 확인했다며 합격이라는 기쁨을 나누어준다. 재수도 아니고 삼수로 붙은 시험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온라인으로 확인되는 결과에 대한 약간의 불안감이었을까? 오늘은 다른 일은 다 잊고 인생 숙제를 해결한 기쁨을 만끽해도 되는 날이다.

 

작년에 손녀 지형이를 출산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내었으니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건축사를 도전하는 여자들이 출산과 육아라는 난관을 넘어가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다. 딸은 학부에서 5년의 수학기간, 1년반의 중국유학,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하면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지난한 시간을 겪고 이 결과를 얻어냈다.

 

딸은 입시를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아버지의 직업인 건축사에 대해 물어왔다. 자식이 부모의 일을 따르겠다니 마땅히 반겨야 했지만 기꺼이 승낙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말릴 일은 아니었기에 선택을 스스로 해라는 말을 했고 딸은 건축학과에 입학을 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같은 일로 길을 걷게 되었다.

 

대학원 진학으로 건축사 자격시험 응시를 몇 해 미룰 수밖에 없었다. 석사학위를 그해 전국 최우수논문상을 받으며 취득하고 더 미룰 수 없었던 결혼을 시험보다 먼저 해야 했다. 아버지의 당부는 결혼하고 나서 시험준비를 하는 게 쉽지 않으니 건축사 자격을 먼저 취득하라고 권했었다. 결혼은 남자는 응원군을 얻지만 여자는 짐을 지는 일인데도 당차게 잘 해 내면서 오늘의 결과도 만들어냈다.

 

건축사 자격시험 합격, 전문직이 예전처럼 따 놓은 당상이 아닌 시절이라 통과의례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서부터 지금까지 해내는 걸 보면 분명 청출어람으로 잘 해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부부의 자식으로, 한 남자의 지어미에 딸을 가진 엄마 노릇과 병행해서 건축사로 당당하게 제몫을 다 할 수 있길 빌어마지 않는다.

 

장한 우리딸, 건축사 시험 합격을 축하하고 세상에 꼭 필요한 전문가로서 미래를 열어가길 바란다. 아버지도 선배로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네 앞길에 디딤돌로 놓는다.

 

오늘은 참 기쁘고 고마운 날이다.

 

 

무 설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