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은 전생을 기억하고 태어나는 것일까? 손주가 자라는 모습을 보노라면 키가 커는 것보다 마음씀씀이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두 돌이 지나면서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쏟아내는데 배워서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손주는 이제 세 돌 하고 여섯 달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나이만큼 부리는 아이의 응석은 당연하지만 배워야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보일 땐 그냥 혀를 내두를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보고 들으며 형성되었을 자아와 다르게 보여주는 행동은 할아버지라서 내 손주가 예쁘게 보이는 것일까?
얼마 전에 손주가 할아버지를 가르치던, 아니 타이르던 얘기를 하려고 한다. 손주가 어떤 행동을 하던지 밉게 보일 일이 있을까마는 그날은 내 목소리가 다른 때와 다르게 들렸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손주가 듣기에는 꾸지람으로 들렸던가 보다.
손주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주방에 있던 할머니를 불렀다. 아내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우리가 있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는 정다운 눈길로 손주를 바라보며 말을 던졌다.
“그래. 우리 지형이 왜 할머니를 불렀어? 간식이 먹고 싶으면 얘기해 할머니가 뭐든지 해 줄게.”
손주는 잠깐 굳어졌던 얼굴을 펴면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할머니처럼 예쁘게 말해야지.”
순간 나는 파안대소를 했지만 아내는 왜 그렇게 웃는지 알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자 아내도 손주를 끌어안고 예뻐 죽겠다며 웃었다. 손주에게 훈계를 받게 된 기막힌 장면을 글로 옮겼는데 상상이 될는지 모르겠다.
육십 년을 더 살았으며 五車書오거서는 아니겠지만 제법 책께나 읽은 할아버지를 아직 네 돌도 안 지난 손주가 제대로 훈계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것도 따지거나 반발하는 게 아니라 할머니처럼 말해야 한다며 존댓말로 엄숙하게 가르치는 게 아닌가? 큰 소리로 웃어넘기고 말아야 할 상황이지만 이럴 수도 있을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글을 쓰다 보니 딸이 손주 또래였을 때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나도 삼십 대였으니 생초보 아빠였다. 겨우 네 살이었던 딸이 무슨 일을 했더라도 얼마나 잘못했을까 싶은데 내 손에는 무언가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딸은 울면서 엄마를 찾지 않고 잘못했다며 조막손을 모아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싶어 놀라 손에 든 걸 내려놓았다. 아비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네 살 먹은 딸에게 매를 들고 있고, 무슨 철이 어떻게 들었는지 꼬마는 잘못했다며 손을 내밀어 벌을 청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날 이후로 어떤 상황에도 딸에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게 되었다.
그 엄마의 딸인 손주가 이제는 할아버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혈육 간에 일어나는 불화는 누구의 잘잘못을 가려 한쪽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자식은 나이를 불문하고 부모의 소유가 아닌 엄연한 인격체로 존중받아야만 오래도록 좋은 관계로 지낼 수 있다.
사람 관계가 종적 체계가 아니라 횡적으로 바뀌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가장 먼저 가족 분위기에 위기가 오는 것 같다. 세태는 급하게 바뀌는데 그 변화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노년층은 말세라며 한탄하며 고립되는 사람이 적지 않아 보인다. 네 살 먹은 손주에게도 배울 수 있어야 조손관계도 오래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할아버지, 그렇게 말하면 안 되고 할머니처럼 예쁘게 하셔야 해요.”
암만, 그렇게 하면 할아버지 하고 오래 놀아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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