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이야기/행복한 삶을 담는 집 이야기

歸家, 우리는 돌아갈 집이 있는가?-무설자의 ‘우리집’으로 짓는 단독주택 이야기 1

무설자 2017. 12. 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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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우리집으로 짓는 단독주택 이야기 1

歸家, 우리는 돌아갈 집이 있는가?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 원경

 

귀가歸家,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여기서 ‘집’과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레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닌 예전, 아침에 집을 나서서 낮에 일을 보고 나면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 건 누구에게나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때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의 마을 어디의 풍경이 다 그랬었다. 저녁이 되어도 사람이 들지 않으니 지금은 집다운 집이 없는 홈리스의 시대라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이제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겠지만 사위가 어둑어둑해지면 집집마다 창에는 불이 들어온다. 아궁이에 불이 지펴져서 집집마다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면 밥 짓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져나가다. 밥에 뜸을 들일 즈음일까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로 골목이 메아리쳤다.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살았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은 집으로 돌아올 사람을 기다리며 밥을 짓는 집, 귀가 시간에 맞추어 종종걸음 치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어둑해지는 시간이 아니라 밤늦은 시간까지도 불이 켜지지 않는 아파트 세대가 자꾸 늘어간다. 

 

끊임없이 지어져서 분양되는 하우스는 있지만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따뜻한 집인 홈은 얼마나 되는가. 더 높고 화려한 하우스는 새 상품으로 공급되고 있지만 홈은 팔고 살 수 없으니 집이 있는데도 홈리스가 된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분양가와 함께 세상에서 젤 좋은 집이라고 하는 그럴듯한 광고 문구에 현혹이 될 만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대학만 들어가면 원룸으로 탈출하듯 독립을 서두른다. 

 

집에서 집을 찾는 도시인의 고뇌는 여느 수행자의 화두만큼 심각하지 않은가?

 

경주 양동 마을-초가집은 건조한 우리네 삶에 푸근한 정서를 불러 일어키게 하는 마음의 고향집이다

 

돌아간다는 것

 

귀향歸鄕, 귀소본능歸巢本能처럼 어딘가 돌아간다는 말은 어쩐지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이 시대의 사람을 뿌리 없이 떠도는 부초에 비유한다. 분명 돌아갈 곳이 없는데도 본능 때문인지 언젠가는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안고 살아간다.

귀소본능을 잃지 않은 건 우리 몸에 조상들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인데
그 본능이 살아 있어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집이 없다

 

귀소본능을 잃지 않은 건 우리 몸에 조상들의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 본능이 살아 있는데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돌아갈 집이 없다. 아무리 최신 아파트라고 해도 부부만 남고 아이들은 원룸으로 탈출하다시피 독립을 서두른다. 일인가구가 전체 세대수의 대세가 되고 있으니 저녁이 되면 돌아갈 집이 없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상이 되어야 하는데 아파트에는 밤 열 시가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세대가 늘고 있다.

 

원룸, 투룸이라 부르는 도시형 아파트는 집일까? 숙소일까? 돌아가서 쉬고 싶은 집이 아님은 분명하다. 돌아갈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유전자에 담긴 귀소본능으로 더 외로워진다.

 

'돌아가고 싶은 집'을 바라는 사람을 위하여

 

집을 떠나 사는 이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은 눈으로 보고 싶은 집이 아닐 게다.  가끔 그저 집에서 살았던 기억을 막연하게 떠올리며 집에서 보냈던 일상을 더듬으며 향수에 젖게 되리라. 엄마가 짓는 우리집 저녁밥 식단만의 독특한 내음, 한겨울 깊숙하게 들어온 남향 햇살에 졸고 있는 어릴 적 내 모습이 그리움이다. 

 

이런 기억이 없이 타향살이를 한다면 돌아갈 곳이 없는 절해고도 유배생활이나 진배없겠다.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을 수 있는 나이의 사람들은 하우스의 상대적인 크기보다 홈의 절대적인 정서의 가치를 더 중시한다. 이미 상품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집, 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는 향수라고 할 만한 이런 추억이 있을까?

단독주택을 짓는 이유는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집’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을 짓는 이유는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집’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담겨 있는 유전자가 바라는 집은 아마도 한옥일 것이다. 온돌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아이고 시원하다’는 탄성을 지르는 ‘우리집’에서 살아야 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설계자의 작품이기 이전에, 건축주 한 사람이 만족하는 집이기보다 우리 식구들의 ‘우리집’이어야 한다. 그 ‘우리집’은 한옥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우리 식구들이 돌아오고 싶은 집이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 들어갔다며 일찍 독립한 아이들도, 결혼으로 출가를 했을지라도 돌아오고 싶은 집이어야 한다.

 

, house와 home

 

아파트 주거는 이 집에서 몇 년이나 살았을까 헤어볼 필요도 없이 수시로 옮겨가며 살아가니 현대판 유목민이라 부른다. 상품으로 공급되는 기성품 집, 미리 만들어서 분양하는 집에서 홈의 정서를 담아 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하드웨어-하우스일 수밖에 없는 게 집이며, 소프트웨어-홈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정서가 담긴 집이 된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사람은 환경에 쉽게 적응하기 때문에 집같지 않은 아파트에서도 불평 없이 살아내고 있다. 그중에서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며 어렵사리 단독주택을 지으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홈이 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내장된 설계 라야 만 우리가 살고 싶은 집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하우스가 아닌 홈이 될 수 있는 집은 식구가 함께 만족할 홈 프로그램을 설계단계에서 담아야만 한다.

 

단독주택은 건축주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결정하거나 건축사의 작품으로 디자인되어서는 안 된다. 그 집을 쓰게 될 식구들이 ‘우리 집’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만 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을 지을 때는 건축주가 쓰지만 시간이 지나면 손주와 함께 지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우스가 아닌 홈이 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내장된 설계로 지어야만
우리가 살고 싶은 '우리집'이 될 것이다

필자 설계 경남 양산 심한재-이 집에서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으니 훗날 손주들을 데리고 '우리집'이라며 찾아올 수 있으리라

 

귀소본능은 누구에게나 살아있다. 우리 식구들이 바라는 ‘우리집’을 짓고 살아야 돌아오고 싶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둥지가 될 것이다. 그런 집이라야 며느리도 사위도 기꺼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가 어우러져서 살 수 있는 집은 우리 시대에는 꿈같다고 한다, ‘우리집’은 며느리와 사위가 ‘우리 식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손주가 ‘우리집’이라며 찾을 수 있어야 단독주택을 짓는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니겠는가? 

 

 손주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우러진 ‘우리 식구’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우리집’인 단독주택은 어떤 집이어야 할까?  그 해답으로 짓는 ‘우리집일 수 있는 단독주택’은 밖으로 나가 일이 마쳐지면 서둘러 돌아가는 집이어야 하겠다. 출가한 자식들도 늘 '우리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서 자주 찾아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자주 볼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무 설 자

 

 

 

무설자(김정관)는 건축사로서 도반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집은 만들어서 팔고 사는 대상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지어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건축설계를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쩌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여 건축과 차생활에 대한 소소한 생각을 글로 풀어쓰면서 세상과 나눕니다.

차는 우리의 삶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이만한 매개체가 없다는 마음으로 다반사로 차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준비하는 분들이나 이 글에서 궁금한 점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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