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행지 좀 찾아 주세요
-사진 빼고 부산일보( 2015, 9,14 자)'아침향기 ' 게재
기사 찾기 :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50914000054
우리나라의 한옥마을 중 그나마 관광지화가 덜 된 양동마을
가을이다. 절기로 백로白露가 지나니 거짓말처럼 바람에 찬기가 묻어난다.
뭘 해도 좋은 이 가을을 누구라도 독서의 계절이라고 잘라서 말한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하다.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제격일 것 같다.’라고 하셨다.
나는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라 말하고 싶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자기 안의 소리를 오롯이 듣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라면 아무래도 가을이라야 할 것 같다.
목적지를 따로 정하지 않고 떠나는 여행이라야 돌아올 때 훌쩍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작은 배낭 하나 적당히 꾸려서 메고 그냥 나선 여행길에서 나와 온전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잊고 있었던 진면목을 만날 수 있게 되리라.
재작년 가을에 딸을 벗 삼아 여행길을 나섰던 적이 있다.
친구 딸의 혼사에 참석하는 길이었지만 내 딸도 혼기가 찬 나이라 괜히 같이 가고 싶었다.
이십대 후반의 딸과 떠나는 여행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좋았던지 누가 알 수 있으리오.
그 도시의 한옥마을에서 분위기 있게 하루를 묵는 일정으로 출발하면서 일부러 승용차를 두고 고속버스로 차편을 이용했다.
성격이 활달하고 말을 재미있게 잘 하는 딸은 주제를 던지는 대로 얼마나 얘기를 잘 하는지 그 도시까지 세 시간, 바깥 풍경을 볼 틈도 없이 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내가 몰랐던 딸의 인생 전반기, 아빠에게 얘기하지 못했던 스물아홉 해의 풀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삶에 쫓겨 제대로 눈길을 주지 못했던 미안함과 이제 같이 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한 아쉬운 감정에 목이 메어왔다.
우리 부녀지간이 괜찮은 사이였던지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도착했다.
숙소로 잡은 민박집에 짐을 풀기 위해 한옥마을에 들어서면서 우리의 여행이 내면 들여다보기에서 한눈팔기로 반전되기 시작했다.
명색이 고도古都의 한옥마을이라고 했는데 웬걸 기와집이 모여 있기는 했지만 좁은 돌담길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오래된 마을이 아니었다. 둘이 눕기에도 좁은 방을 칸칸이 넣어 비싼 숙박비를 받아 챙기는 무늬만 기와집, 돌을 깔아 만든 호사스런 길에 한옥풍의 상가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관광민속촌이었다.
여행자로 숨어들 듯 찾아들어 하룻밤을 한옥의 정취에 젖어보려 했던 우리의 바람이 무너지면서 여행자로서의 여정은 고속버스에서 내리며 그치고 말았다.
여행과 관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여행은 방문지의 일상에 동참하여 새로운 경험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관광은 구경꾼으로 볼거리를 찾아 관광버스로 도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여행자는 객으로서 예를 갖추어 방문지의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관광객은 돈을 쓰고 가는 주체이므로 일탈의 행위마저 서슴치 않는다.
여행지는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의 일상이 살아 숨 쉬지만 관광지는 관광객의 주머니를 넘보는 눈요기 시설과 상인이 있다.
여름이 휴가철이라면 가을은 관광철이 된다.
길을 메우는 관광버스의 행렬이 곧 전국의 관광지를 난리통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호젓이 걸을 수 시골길마저 둘레길이니 올래길이니 하는 관광 시설로 만들어 버렸고 그 길에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일상은 보호받지 못하고 여행자들마저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감천문화마을이 세계적인 명소라는 타이틀을 업고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관광명소가 되면서 주민들이 누려야 할 그들만의 일상은 더 이상 보호받기 어렵게 되었다.
주말과 휴일이면 마을로 밀려드는 관광객을 피해 집에 있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연세든 주민들이 집을 벗어나 어디로 피해 갈 데가 있을까?
산복도로의 또 다른 어느 마을을 제2의 감천문화마을로 만들려고 하는 회의에서 주민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구경꺼리가 됩니까?”
가을이 관광철이 아닌 여행의 계절이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관광지로 변해버린 우리나라에 여행자가 갈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하면 과한 얘기일까?
김 정 관 / 건축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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