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아침향기 2015.11.16자 게재
꿈꾸는 책방 ‘시집’에서 보수동책방골목 르네상스를 보다
김 정 관
퇴근길은 겨울 냄새가 묻어나는 찬바람이 스산하게 몸 안으로 스며드니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중앙동 전철역에서 보수동 집으로 향하는 버스로 갈아타지 않고 오십계단을 거쳐 골목길을 배회하다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의 대청동 거리를 걷는다. ‘날개 없이도 그는 항상 하늘에 떠 있고/새보다도 적게 땅을 밟는다’는 김기택 시인의 시 구절처럼 우리는 걷고 싶은 길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걷고 싶은 길이 집 주변에 있으니 나는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며 자주 걸어서 출퇴근하기를 즐긴다.
대청동 큰 길을 지나 국제시장 입구 사거리를 건너 보수동책방골목으로 접어든다. 큰길을 버리고 책방골목을 거치는 코스를 선택한다. 여덟시 가까운 시간이면 이 골목의 서점들이 거의 셔터문을 내린 상태라 골목길을 걷는 맛이 덜한 게 좀 아쉽다.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주인장 아저씨들께 건네는 인사는 나도 책방골목을 좋아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는 응원의 메시지이다. 여기를 지나면서 책방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이 골목의 정취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하릴없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이백여 미터의 골목을 따라 쉰 곳이 넘는 책방이 들어서 있어 서점이 귀한 지금은 헌책방골목이 아닌 서점밀집거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명소가 되었다. 아직도 절반 이상의 책방들은 헌책을 사고팔면서 형성된 한국전쟁 시절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이 비켜서 지날 정도로 좁은 골목길에 문으로 경계를 짓지도 않고 헌책창고처럼 책을 쌓아두고 서점은 운영하고 있다. 몇몇 책방은 취급하는 책을 특화시켜서 전문서점으로 운영하고 있고, 책방에다 차를 마시는 카페 공간을 부설해서 책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한 이름에 어울리는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우리글방은 일찍 문을 닫으니 참 아쉽다.
좁은 골목을 백여 미터를 지나 차가 들어올 수 있는 폭을 가지는 길을 만나면 책방골목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여기서부터 백여 미터의 길은 골목이 아니다보니 책방보다는 카페와 음식점, 술집 등의 생활편의시설이 혼재된 분위기라 책방골목의 고유한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이 길의 절반은 마을버스가 다니고 차량이 들어오기에 더 이상 골목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가을마다 열리는 책방골목 축제 때는 이 거리가 장터처럼 행사장으로 쓸 수 있으니 책방골목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이 공간이 수행하고 있다. 이 길이 책방골목의 분위기와 어울릴 수 있도록 조성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넓은 길로 곧장 가야 집으로 바로 가는데 오른편으로 비켜서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 골목도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길로 근래에 책방골목의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어주는 책방과 카페가 문을 열었다. 이 골목은 책방골목의 주노선에서 벗어나 있어 관심을 가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이 골목에 내가 자주 들르게 되는 책방이 생겨서 참새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방앗간처럼 되었다. 시인이 운영하는 ‘시집’이라는 책방인데 누가 들어가 봐도 책을 파는 분위기가 아니다. 책도 팔기는 하지만 그보다 다른 걸 더 많이 담고자 기획된 책방이라고 주인장이 얘기한다. 누구든 소중하게 여기는 장서를 이 책방에 보관해두고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유서재로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시낭송모임과 글짓기 공부도 한다고 한다. 더 흥미로운 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특별한 공책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 책방에 들르고 싶은 흥미꺼리가 너무 많아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가보길 권하고 싶다. 시집에서는 차 한 잔 하면서 있다 보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므로 시계를 수시로 들여다봐야 한다.
좁은 골목길에 면한 서점들은 보수동책방골목의 옛 정취를 지니기 위해서 변화보다는 지금의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수사거리에 면한 넓은 길은 기존의 골목과는 다른 새 분위기의 ‘책방거리’로 조성되었으면 좋겠다. ‘시집’이 있는 골목이 책을 주제로 한 개성 있는 카페와 책방이 들어서면서 보수동책방골목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어키고 있어 보이는 것이 얼마나 고무적인지 모르겠다. 책방골목의 르네상스를 여기에서 기대해보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참새방앗간이 된 ‘시집’이 있어 퇴근길이 기다려지는 나의 일상처럼 책방골목에 개성 있는 책방이나 흥미로운 공간들이 더 생겨나서 많은 사람들이 퇴근 시간을 기다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서둘러서 집에 가야한다. 집에 도착해야 할 예정시간이 꽤 지나서 저녁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아내의 확인전화가 온지 한참이 지났다. 또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지만 원도심에 살면서 누리는 작은 행복의 대가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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