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설자의 에세이 차 시음기
아내여, 내 부족함을 모르지 않으나
-맹해지춘 '06, '09, '11을 마시면서
참 희한한 일입니다.
아내와 연애를 하던 그 시절에는 마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편지가 유일했었지요.
딸이 일년반을 유학 하던 때 메일로 가끔 주고 받았지만
이렇게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시음기를 쓰게 되니 차닉골 촌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어쨋든 잘 마시지 않은 생짜배기 생차를 마시면서 편지를 써 봅니다.
아내여,
우리가 가족을 이룬지 벌써 서른해를 앞두고 있구려.
결혼한 그해에 허니문 베이비로 얻은 우리딸이 벌써 서른 살을 앞두고 있네.
이룬 것도, 얻은 것도 없이 세월은 무심하게 여기까지 데리고 왔구려.
아직도 함께 일을 하며 내일을 기약하자며 편한 삶을 누리도록 하지 못해 미안하네.
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살아온 그대로 공덕이 되어 곧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 생각하오.
그러니 내 일터에 걸어둔 이 그림의 소나무처럼 늘 푸르런 생기를 잃지 말고 살아갑시다.
저 소나무도 힘든 때는 눈물을 흘리듯 잎도 떨군다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꽂꽂한 기상을 잃지 않으니 그림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는다네.
차는 은근한 맛과 향을 주기에는 차는 꼭 우리 부부 같아서 늘 우리와 함께 하지요.
이번에 차닉골의 촌장님이 좋은 차를 보내주어서 음미하면서 우리가 함께 사는 의미를 나눠볼까 하네.
차 이름이 맹해지춘이라 하는데 보이차가 나는 운남성의 성도 쿤밍은 늘 봄날씨라 춘성이라는 별명이 있다고 하더군.
운남은 봄같이 따사로움이 있는 곳 같은데 이 차의 이름에 봄이 들어 있으니 느낌이 참 좋네?
맹해는 차나무의 원산지인데다 가장 큰 차창의 이름이지.
맹해지춘, 맹해의 봄 느낌을 이 차에서 맛 볼 수 있을까?
이상 기후로 잃어버린 이 시대의 봄,
그래서 차를 마시며 늘 봄을 음미한다고 하면 어떨까?
우리 부부도 겨울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봄 같은 우애로 함께 해 온 것 같아.
차닉골 촌장님이 맹해지춘을 2006년, 2009년, 2011년 차를 보내 주셨네.
세월을 먹을수록 향미가 깊어진다하여 월진월향이라고 부르는데 5년의 시간차가 어떤 맛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 궁금증은 마셔보면 알 수 있겠지?
세월이 함께 해서 좋은 건 술과 벗이라는데 우리도 이제 30년 가까이 묵은 사이라 아주 좋은 벗이라 생각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보이차도 묵은 세월만큼 좋아진다고 하니 우리 부부도 이 차와 함께 어우러져서 묵어가 보세나.
7년, 4년, 2년이 지난 이 차는 어떤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할까?
세 가지 차를 겉 모양만 보아서는 알 수 없어 보이네?
사람이 서로 알아가는데도 제법 지내봐야 되듯이 십년도 안 된 세월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가봐요.
하긴 겉모양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좋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ㅎㅎㅎ
세 가지 차를 우려 보았는데 탕색으로도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네.
탕색으로만 본다면 맛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지요?
역시 겉모양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세상사라고 그대가 귀가 여린 내게 자주 얘기해 주는 것이 생각나오.
차를 우려내고 난 엽저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요?
잎에서 뽑아져 나온 탕색이 그러니 엽저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사람을 분별할 때 말이나 표정을 잘 살피면 알 수 있는 것도 이와 같겠죠?
만약에 세월을 오래 지나지 않은 차가 탕색이 붉다면 보관환경을 의심해야 한다오.
습기가 많은 장소에 보관한다면 차가 빨리 익는데 적당한 습기가 아니라면 좋지 않은 문제가 생기지요.
사람이 살아가면서도 적당한 어려움은 철이 드는데 도움이 되지만 너무 힘든 생활은 마음을 피폐하게 할 수 있는 것과 같겠지요.
보이차가 마실수록 정이 드는 건 사람이 사는 이치와 닮아 있는 것 같아서라오.
풋풋하고 싱그러웠던 그대가 억세진 것이 나와 살아오면서 힘든 환경을 지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오.
그렇지만 착한 심성은 그대로인 걸 보면 고운 천성을 타고난 덕택인 것 같소.
그래서 보이차도 근본이 되는 좋은 차엽으로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가 보오.
이 차는 근본이 괜찮은 차인 것 같으니 보관환경을 잘 갖추면 좋은 차로 익어갈 것 같소.
봄향기를 지닌 차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네요.
어린 잎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햇차에 가까운 11년 차도 부드러워서 지금 마셔도 될 것 같소.
06년 차보다 09년 차가 더 부드럽고 탕색이 짙어진 걸 보니 보관환경의 차이가 아닌가 싶소.
06년 차는 아직 떫은맛이 많아서 세월을 너무 곱게 보낸 것 같지요?
차는 전체적으로 세월을 오래 묵히지 않아도 마시는데 부담이 없는 차 같아요.
근본이 좋으면 사람이나 차나 가까이 하게 되나 보오.
30여년을 함께 살아도 처음보다 더 좋은 그대는 나와 전생의 숙연인지 알 수 없지만...ㅎㅎㅎ
차향은 차를 마실 때 보다 마시고 난 빈 잔에서 음미하게 된다오.
사람의 향기도 함께 있다가 헤어지고 난 뒤에 알 수 있는 이치와도 같지요?
차를 마시고 나니 내 방에 차향이 가득한 게 마실 때는 맛으로 그 후에는 차향이 오래 남네요.
좋은 차를 마시면서 그대에게 사는 얘기를 전하게 되니 가을이 지나고 있음을 알게 되오.
올해도 한달이 조금 남았구려.
해마다 공염불처럼 읖조리는 약속을 해를 넘기지 않고 지킬 수 있으면 좋겠소.
내 방에서 나와 같이 차를 마시는 난이 싱싱한 걸 보니 차는 역시 좋은 것인가 보오.
매일 차를 마시며 사는 환경은 어렵지만 마음을 지키면서 괜찮은 남편임을 꼭 보여 주겠소.
좋은 차를 마시며 그대에게 한 묵은 약속을 다시 일깨웠다오.
아내여,
사랑하오.
2013년 만추의 밤에
아직 익어야 할 세월을 못채운 남편이.
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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