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말 없는 말

秋情雜談

무설자 2010. 10. 13.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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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 벚나무가 푸른 잎 속에 숨어 몇 잎이 색깔을 바꾸더니 며칠 새 몇 가지는 제법 붉은 잎이 짙어졌다. 그렇게 문득 가을이 내 앞에 와서 서 있음을 느낀다. 가을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이치를 실감하게 하는 계절이다.

 

'모든 것은 변하노니 쉼 없이 정진하라'는 부처님의 유훈을 몸으로 느끼면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절절한 생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때라고 한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무엇을 얻으려 이렇게 싸우듯 살고 있는가?’라는 명제를 떠 올려 본다. 해마다 가을 막바지가 되면 나무는 그 푸르름으로 가득했던 나뭇잎을 마침내 한 잎도 남김없이 털어버리고 빈 가지만 남은 채 서 있을 것이다. 해마다 그걸 보면서도 무상의 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니 아마도 올해도 나이만 한 살 더할 뿐 그냥 또 한해를 넘기고 말 것이다.

 

이 가을, 내 나이의 사람들은 가을을 보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할 첫사랑의 추억을 아직도 끄집어 내보기는 할까? 봄은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지만 가을은 이별의 인연을 떠 올리는 계절이라고 하기에. 몸으로는 나이를 먹는다지만 아직도 마음은 청춘이라 애틋한 헤어짐의 기억 한토막으로가을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면 그또한 행복한 일이지 않은가?


불가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재가불자나 출가자에게나 공부에 장애가 된다하여 경계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아직 부처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중생에게는 애틋한 사랑의 기억이 오히려 힘든 공부를 이겨내는 활력소가 되기도 할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사막을 건너가다 탈진해서 죽을 고비를 만나지만 애욕을 에너지로 삼아 이겨내는 장면도 있으니.

 

부처가 되고나면 참 심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에든 집착해서 지나치면 문제가 되지만 선線을 지켜가며 사는 것도 중생으로 사는 재미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재미있게 살기는 어려울 것이니 중생의 삶도 그렇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고 궤변을 만들어 본다. 부처에 다가갈수록 인간미가 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 텐데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딱딱한 건 왜 그런 것일까?

 

법정 스님의 수필집에 보면 스님께서 갓 출가시절에 호롱불을 켜고 주홍글씨라는 소설을 숨어 읽었다고 한다. 스승이신 효봉 스님이 그것을 아시고는 아주 엄하게 호통을 치셨다. 출가자가 쓰는 모든 물건은 신도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 올린 공양물인데 그것을 출가자가 본분을 지켜 공부하는데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효봉스님은 출가자는 음식을 입에 넣을 때 뜨거운 쇳물을 먹듯 해야 한다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만약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으며 가벼이 시물施物을 쓴다면 내생에는 손발이 없는 과보를 받을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다. 이 얼마나 살벌한 분위기인가?

 

그래서 스님이 아니더라도 종교에 심취한 분들은 재미가 없나 보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왠지 좀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나도 인기가 별로 없나 보다. 어떤 자리에서도 내가 말을 꺼내면 그만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보면 분명히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속 일에 한눈을 팔게 되었다. 일찍 불교에 심취해서 머리만 깎으면 중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을 만큼 재미없이 살다가 '재미'에 눈을 팔게 되었는가 보다.

 

부처가 되는 공부는 정말 재미가 없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이라면 세상을 바꾸려하기 보다 자신을 바꾸었기 때문에 일상사를 잘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원만하고 여유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딱딱하고 여유가 없는 이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깨달음에도 수준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일 것이라 항변해 본다.


 

가을이라 떠올려보는 무상無常의 이치란 일어날 때 이미 흩어짐을 안고 있는 구름같은 것 아닐까? 봄에 피는 꽃에는 열매의 속성이 기약되어있고 여름의 푸른 잎에는 화려한 가을 색이 이미 담겨 있을 것이다. 사랑 또한 이별을 담고 있고 달콤한 언약에는 어차피 다 지키지 못할 말의 공허함이 숨겨져 있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로 이별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을 나무에 매달린 열매는 봄에 피었던 꽃 중에서 십분의 일이나 될까? 연인들이 사랑한다고 하며 내밷는 수많은 얘기는 그냥 떨어져 버리고 마는 꽃같은 것이다. 그 중에 귀를 즐겁게 하고는 흩어져 버리는 것도 있고 열매처럼 어렵게 사랑으로 익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말은 대부분 떨어져 버린 꽃 같은 얘기이리라. 그래서 그 기억만은 아름답게 남아 오래오래 가을마다 떠올리게 되는 것일까?

 

쉰을 넘기며 살아가는 나이에 꽃다운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즐거운 것은 가을에 어울리는 나이이가 되었기에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쓰게 되는 것도 나이와 어울리는 때인 이 가을을 그냥 보낼 수 없기 때문이라며 억지로 둘러대 본다. 이런 상념이 이 팍팍한 시절을 이겨내는 약이 될지도 모르겠다.

 

 

절 마당 앞 큰 벚나무에도 가을색이 물들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가을도 오는 기척도 없이 왔다가 간다는 기별도 없이 가 버릴 것이다. 오는 가을이 아쉽다고 잡아두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가을은 앉아서 머무를 손님이 아니라 선 채로 물 한 모금 마시고 가는 바쁜 손님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는 가을이 가기 전에 아리도록 아쉬운 지난 추억을 끄집어 내어 이 가을을 누리는 것은 어리석은 나의  큰 일이다. (2010, 10,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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