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야기
작년 가을, 우연히 알게 된 분으로부터 불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50대 초반의 여자 분인데 꽤 많은 유산을 상속받아 그 돈으로 절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인생 후반부에 정신적인 방황을 하던 중 불교를 알게 되었고 참 삶의 길을 찾게 되어 절을 지어서 회향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군데 절을 다녀 보면서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찰이 전통이라는 형식에 얽매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요구하는 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그릇으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도 그 부분에 대한 것이 평생을 통해 풀어보고 싶은 과제였기에 금방 의기투합이 되었고 대지가 확정 되는대로 본격적인 작업을 하기 위한 사전 작업부터 진행하였습니다. 기와집이 아닌 이 시대에 맞는 현대적 건축형식으로 가지는 사찰, 콘크리트를 구조체로 하는 사찰설계를 몇 건 하였지만 기와지붕을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의 사찰건축에 대한 원력이 이 일을 기점으로 마음껏 펼쳐질 수 있다는 부풀어 있던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차 대지에 맞는 안이 다 나와 협의를 할 날을 잡던 중, 그 분 옆에서 일을 도와주던 보살님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 일들이 다 그 분이 꾸며낸 거짓이라는 것이었고, 철저하게 각본을 짠 사기행각이어서 불사에 동참한 주변의 여러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는 얘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기에 기꺼이 정성과 시간, 돈까지도 내놓으면서 동참할 수 있는 불사를 수단으로 이용하여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불자라는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는 것입니다. 저의 올 겨울은 그렇게 추운 계절이었습니다.
봄 이야기
아내는 지난 가을 우리 절 환희불교복지대학에 등록하여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기간 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론과 병행되는 환자를 위한 여러 가지 실습과정은 집에 와서 복습을 했습니다.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환자에게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면서 호스피스의 자세를 제대로 갖춰갔습니다.
2개월이 지나 졸업을 하고 지금은 매주 금요일마다 노인병원에 봉사를 다닙니다. 처음에는 노인병원의 병실환경과 환자를 대하는데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힘들어했습니다. 이제는 금요일이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빠지면 안 된다는 결심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그 분들이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봉사자들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만약 봉사자들이 오지 못한다면 그 분들은 목욕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봉사자들은 단순히 목욕을 시켜드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 분들에게 정을 전하고 오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몸을 만지면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거부하는 몸짓을 하지만 아내가 시중을 들면 순한 양처럼 말을 잘 듣는 분도 있다면서 기뻐합니다.
그 분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공부를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분들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기에 봉사를 통해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느꼈다고 합니다. 시간의 여유를 그분들에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아내에게 존경심마저 생깁니다.
불교를 머리로, 입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나누고 전하는 그 모습에서 진정한 보살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 집에는 봄이 벌써 와 있었습니다.
아직 겨울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얼굴에 스치는 바람에서 봄이 느껴집니다. 이 바람이 땅을 어루만지면 풀이 돋아나고 마른 나무를 스치면 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겨우내 땅 밑에서 봄을 준비한 결실이 온 산으로 들로 꽃으로 황홀하게 피어납니다.
계절은 봄이라도 숨어 움츠리며 차갑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겨울이라도 나서서 따뜻함을 전하는 이도 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은 멀리 있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지만 정작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찾으신 깨달음도 멀리 있는 것을 찾아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봄은 겨울에도 땅 밑에, 마른 나무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제 그 봄은 싹으로 돋아나고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원래 갖춰져 있는 행복을 싹이 돋듯이 꽃으로 피듯이 그렇게 찾아내는 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늘 기쁜 날로 마음을 돌아보면 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005.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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