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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설자의 에세이 차이야기 0902
버리고 떠나기
이삿짐을 쌉니다
서른 다섯 평을 가득 채웠던 짐을 버리고 스물 한 평으로 옮길 짐을 꾸립니다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고 가져갈 짐도 풀어놓지 못할 짐은 박스에 따로 포장을 합니다
육년 전 이 곳으로 짐을 풀 때는 다시는 옮기지 않으리라 했던 그 생각을 다시 줏어담습니다
유목민처럼 옮겨다니기 쉬울 짐이면 좋으련만 설계사무소의 짐은 욺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가마다 가득찬 책을 꺼집어내니 사무실에 한가득입니다
이사를 한다고하니 그 이유를 다들 묻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확장개업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 좋은 위치로 옮겨가는 것이니 영전개업인가요? ㅎㅎㅎ
되도록 버릴 수 있는 것은 다 버리자고 마음을 먹고 짐을 쌉니다
1994년에 여러 명이 법인을 만들어 사무실을 열었던 짐들이 저를 따라 여기까지와서 이제 정리가 되나봅니다
법정스님의 수필집 이름처럼 버리고 떠나기를 실천해야합니다
이틀동안 부지런히 짐을 분류하고 가구는 다 묵은 것이라 대부분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꼭 들고가야할 것만 챙겨놓으니 의외로 옮길 짐은 단촐합니다
도면을 만들어 짐을 배치해보니 이사할 공간이 열네 평이나 줄었는데도 오히려 면적은 더 여유로워졌습니다
짐을 다 꾸리고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것이 제 작업대 위의 차판입니다
짐을 꾸리는 내내 차를 마시는 건 멈출 수가 없지요
짐 정리를 도와주러 온 옮겨갈 빌딩의 주인과 이곳에서의 마지막 차를 한 잔 마셨습니다
차 한 잔을 놓고 짐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잠깐 돌아봅니다
일이 많이 준비되었던 그 해 사무실을 확장하느라 이곳으로 옮겨 힘든 시기를 겪었지요
기대했던 그 일들이 정책의 요동 속에 대부분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좋은 분들은 참 많이 만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를 알게 되었지요
일이 끊기다시피 한 1995년, 카페를 통해 중국차를 알게되어 마음의 위안과 소일거리로 차를 마셨답니다
차가 없었다면 그 어려운 이태를 어떻게 버텼을까요?
한승원님의 시 한 수가 이때 만난 가르침입니다
녹차 한잔2
영원히 살 것 같은 때 마시고
내일 죽을 수도 있음을 깨닫고
절망적일 때 마시고
세상은 제법 살만한 세상임을 생각하고
영원히 살 수도 있음을 깨닫고.
이런 마음으로 더 여물어지고 흐르는 물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애썼습니다
맛도 향도 없는 보이차를 알면서 그 속에서 맛과 향의 숨은 의미를 찾는 기쁨을 알았습니다
이제 버릴 것은 버리고 잊어서는 안 될 마음만은 잘 챙겨서 남은 차판으로 마지막 짐을 꾸립니다
무 설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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